나는 요즘 업둥이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어느 날 새벽녘에 노란 배냇저고리에 초록 턱받이를 하고 우리 집으로 왔다. 자식들이 내 품을 떠나고 심드렁하던 일상에 가슴 철렁할 일이 생겼다. 내 집으로 보내졌으니 잘 키워야지 다짐을 한다. 혹시 소문이라도 날까 쉬쉬 대문에 걸쇠도 걸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녀석은 무언가 특별하고 달라 보였다. 예쁘기도 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한눈이라도 잠시 팔고 나면 쑥 자라있는 녀석은 이러다가 백일 안에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거짓말을 한다는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집은 매년 조그마한 텃밭에 별다른 손길이 필요 없는 고추, 깻잎, 상추를 심어먹곤 했다. 농사법이라야 고작 계분과 퇴비를 사다가 뿌려주는 정도이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정성껏 물을 준다. 땅을 향하던 물줄기를 공중에 대고 뿌릴 때는 무지개가 만들어지는 재미도 만끽할 수 있다. 동심의 한 순간이 하늘에 펼쳐진다. 올해도 무얼 심기 전에 옥토를 만들려는 심산으로 일단 거름을 먼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삐죽삐죽 새순이 돋기 시작했다. 종류를 알 수 없는 그것들은 하루 비 오고, 하루 덥기를 몇 차례 반복하더니 순식간에 호박 동산이 되어 버렸다. ‘호박이 넝쿨째…’ 라는 말이 이런 것인가. 언뜻 작년 여름 식품점에서 비싼 단호박 하나를 산 기억이 났다. 그것을 귀히 여기며 호박죽을 쑤어먹을까, 그냥 쪄서 먹을까, 아니면 속을 파내고 찹쌀에다 팥, 대추, 밤, 은행을 넣어 영양밥을 해 먹을까 망설이며 모시고 있다가 썩혀 버린 적이 있다. 너무도 아까웠다. 나는 장례라도 치르는 양 호박을 밭에 묻고는 거름으로 태어나라고 애도했다. 그리고 다시 호박을 사러 식품점으로 갔으나 이미 끝물이라 했다. 또 한 번 안타까움을 느끼며 빈손으로 돌아왔다.
나는 요즘 튕기면 튀어 오를 것만 같은 공처럼 생긴 업둥이를 어루만지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누가 호박을 못생겼다 했는가아…. ‘창밖의 여자’ 유행가 음률에 갖다 붙여 불러보았다. 작정을 하고 씨를 뿌리지도 않았건만 난데없는 호박이 나를 즐겁게 한다. 처음에는 건강하게 자라질 못하고 애를 먹였다. 방울토마토 만큼만 자랄라치면 마치 그 옛날 열악한 환경 탓에 백일을 못 넘기고 죽는 아이처럼 누렇게 병이 들어 모가지가 떨어져 나가곤 했다. 백방으로 귀동냥을 하여 약도 치고 영양이 분산되지 않도록 새순도 따주고 하였더니 어느 순간 탁구공 크기로 넘어가더니 하루가 다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색깔도 초록과 연두 두 종류이다. 호박을 키워서 가르면 금과 은이 들어있을 것만 같아 금초록과 은연두라고 이름 붙였다. 금초록은 치자꽃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제 집인 양 매달려있다. 향이 좋은 꽃나무가 점점 자라나는 금초록의 무게가 힘에 겨운 듯 아담한 나무의 중심이 삐딱하게 휘어진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는 않다. 은연두는 장미꽃 나무 옆 땅바닥에 배를 깔고 꽃을 바라보고 있으나 가시를 보았는지 무례하지는 않다. 이것을 보니 나무를 타고 오르고, 흙장난을 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련하게 오버랩 되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린 것들에게는 특별함이 묻어있다. 호박들에게서 내 아이들의 유년이 보였다. 다소 당돌하고 이기적인 큰아이는 치자나무를 괴롭히는 금초록과 닮아있다. 누군가 옆에만 있으면 뒹굴뒹굴 순하던 작은 아이는 장미꽃을 바라보는 은연두와 비슷하다.
두 아이에게 등을 내밀어 그것들을 업어 키우느라 휘어버린 어머니의 등을 치자나무에서 보았다. 아기의 쌔근쌔근한 숨결을 등으로 맛보지 못한 어미의 아픔은 장미의 가시가 되어 가슴을 뚫고 나왔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나가 아기 호박과 눈 맞춤을 하고 밤새 자랐구나 얼러준다. 눈부신 햇살을 받은 갓난 호박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채 푸릇한 옹알이를 한다. 조금 더 자란 것은 솜털이 군데군데 벗겨져 나가며 한층 초록으로 영글고 있다. 태양의 노고와 달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그것들이 그들을 닮아가려는 듯 하늘을 향해 동그란 공이 되어간다. 시시각각 풍선에 바람을 넣는 양 부쩍부쩍 자란다. 전에 없던 벌도 날아다닌다. 벌들은 오래 전 고추장, 된장 항아리 옆에 의자 삼아 통나무를 하나 놓아두었는데 그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 통나무는 세월 속에 시커멓게 썩고 빠개져서 나이테를 가늠할 수도 없다. 내다 버려야지 하던 그 틈 사이로 벌들이 들락날락한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벌들은 해가 중천에 떠올라야 일을 시작한다. 내 집 뒷마당의 벌들은 호박꽃 위를 선회하다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꽃술로 들어간다. 일정 시간이 지나서 나와서는 다른 꽃으로 이동을 한다. 금방 벌이 나온 꽃 속으로 또 다른 벌이 들어간다. 아무것도 없을 텐데… 하는 나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중 들어간 놈도 먼저 들어간 놈만큼 머물다가 나온다. 한 모금의 꿀과 몸에 묻힐 꽃가루가 그래도 남아 있나 보다. 이렇게 자연조차도 홀로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탄생과 성장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자식농사에는 오죽 손이 많이 갈까 하는 생각이 들자 바짝 조바심이 들었다. 낮 열두시가 지나도록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우지 않는 나의 영농법을 성찰해보았다. 나는 썩지 않는 씨앗은 아닌가, 부석한 토양은 아닌가, 침 없는 벌은 아닌가, 구름 속의 태양은 아닌가, 빗속의 달은 아닌가…. 서둘러 아이들을 깨워서 늦은 아침을 먹이고 뜨거운 뙤약볕으로 내 몰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째 그대로인, 다 자란 맞물 금초록과 은연두를 가위로 땄다. 탯줄을 자른 양 꼭지에서 맑은 피가 흘렀다. 치자나무가 허리를 펴고 장미나무가 한숨을 돌린다. 나는 그것들을 고이 모셔둘 작정이다. 썩기를 기다려 땅에 묻을 것이다. 다시 올 업둥이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정녕 새 생명에 대한 벅찬 기다림일 것이다. 올 여름 시퍼런 뒤뜰에서 살다간 업둥이가 내게 준 기쁨은 이러했다.
해와 달을 바라보는 몇 개의 동그란 호박과 두 개의 항아리와 썩은 통나무 하나가 하늘 아래 천국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 업둥이 엄마는 행복했네.
이항아 / 수필가, 호주문학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