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서 상 여성’이 여성 아닐 수도
영국 대법원이 여성의 정의를 ‘생물학적 여성’으로 한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성별 인식 증명서를 발급받은 남성이 법적으로 여성이 아니라는 내용의 이번 판결은 여성 인권단체들로부터 즉각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번 판결은 지난 7년간 여성 인권 단체 ‘For Women Scotland’가 주도해온 법적 투쟁의 결정판이다. 대법원은 남성이 스스로 여성이라고 주장하거나, 의료적 절차 없이 증명서를 발급받은 경우에도 법적으로 여성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성 인권단체 ‘Sex Matters’는 “법원이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며 환영 의사를 밝혔다. 단체 측은 “법적으로 보호받는 성별 특성은 서류가 아니라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성 단체 “완전한 승리”
‘For Women Scotland’는 “이것은 단순한 판결을 넘어 모든 여성에게 의미 있는 승리”라고 밝혔다. 단체는 성명을 통해 “그동안 침묵을 강요받고, 자리를 양보하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여성들에게 이제 법적인 정의가 내려졌다”고 강조했다.
성평등법 ‘생물학적 성’ 기준
패트릭 하지(Patrick Hodge) 대법원장은 5인의 판사단을 이끌며 “이번 판결은 만장일치로 내려졌으며, 2010년 성평등법(Equality Act 2010)에서 ‘여성’과 ‘성별’이라는 용어는 생물학적 여성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그는 트랜스젠더가 차별과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덧붙였다. 하지 대법원장은 “이번 판결을 특정 집단의 승리나 타 집단의 패배로 해석해선 안 된다”며, “성평등법은 성전환 특성 외에도 직접적·간접적 차별, 괴롭힘에 대해서도 보호 장치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코틀랜드 정부에도 타격
이번 판결은 스코틀랜드 정부의 정책 기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스코틀랜드는 ‘여성’을 스스로 여성이라 주장하거나 성전환 증명서를 가진 사람까지 포함해 정의해왔다. 특히 정부 산하기관 이사회에서 여성 비율을 50%로 유지해야 한다는 규정에서, 생물학적 남성도 여성으로 간주해온 정책이 이번 판결로 무효화됐다.
법원은 이러한 해석이 성평등법상 ‘여성’과 ‘남성’의 정의를 훼손하며, 법률적 일관성을 해친다고 지적했다.
여성 전용 공간 법적으로 보호
이 판결은 탈의실, 스포츠 경기, 병원 병동 등 여성 전용 공간의 법적 보호를 강화하게 된다. 또한 동일 임금 청구권, 출산 정책 등에서도 생물학적 성이 기준이 된다. 법원은 ‘성별’이라는 용어가 사람의 감정이나 사회적 인식이 아닌, 염색체(XX 또는 XY)를 기준으로 한 생물학적 성별을 의미한다고 재확인했다.
트리나 버지(Trina Budge) ‘For Women Scotland’ 대표는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성별 정의를 현실에 기반하지 않으면, 공공기관 이사회에 남성과 ‘증명서 여성’이 각각 50%를 차지하더라도 여성 할당 비율을 충족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며 “그 영향력은 화장실, 병원 병동 등 일상생활 전반에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호주 판결에도 영향 가능성
이번 판결은 최근 호주 연방법원 ‘티클 대 기글(Tickle v Giggle)’ 사건과 비교되며 국제적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사건에서는 트랜스젠더 여성 록산 티클(Roxanne Tickle)이 여성 전용 소셜 앱 ‘기글(Giggle)’에 접속하지 못해 성 정체성 차별을 당했다고 판결받은 바 있다. 이에 따라 호주 사법부가 이번 영국 대법원 판결을 주의 깊게 검토할 가능성이 높다.
“성 개념은 변할 수 없다”
영국 대법원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어가 ‘변동 가능한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도 일축했다.
법원은 그러한 해석은 동성애 여성 커뮤니티, 여성 전용 단체 등의 법적 보호를 약화시킨다고 판단했다.
성 인권단체 ‘Sex Matters’의 마야 포스타터(Maya Forstater) 대표는 “이제 성 자가 인식(self-ID)은 끝났다”고 강조했다. 포스타터는 지지자들과 포옹하며 “이것은 최고 법원의 판결이다. 성평등법의 ‘성’은 생물학적 성을 의미하며, 이제 스스로 인식하는 성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작가J.K.롤링도환영
여성의 성별 기반 권리를 지지해온 소설가 J.K. 롤링(J.K. Rowling)은 “영국 전역의 여성들의 권리를 보호하게 됐다”며 “이 판결은 놀랍도록 집요하고 용감했던 세 명의 스코틀랜드 여성과 그들을 지지한 수많은 사람들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롤링은 X(구 트위터)에 “오늘 대법원에서 승리한 이들은 생물학적 여성, 성전환 여성 포함 여성들, 동성애자,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지키려는 이들, 그리고 생물학적 성의 실재를 믿는 이들”이라고 글을 올렸다.

트랜스 단체와 국제앰네스티는 우려
하지만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머메이즈(Mermaids)’는 이번 판결이 “광범위하고 유해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국제앰네스티 영국 지부의 사치 데시무크(Sach Deshmukh) 대표도 “오늘의 판결은 분명히 실망스럽다”며, “복잡하고 긴 판결이라 그 전체적인 의미를 분석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치권에도 파장
이 판결은 스코틀랜드를 넘어 영국 정치권 전체에 여파를 미치고 있다.
노동당은 여성 정의에 대한 기존 입장을 일부 철회하는 모양새다. 보수당의 케미 바데노크(Kemi Badenoch) 의원은 “키어 스타머(Keir Starmer) 당수가 ‘여성에게도 남성 성기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밝혔다. 노동당에서 탈당한 무소속 의원 로지 더필드(Rosie Duffield)는 “노동당은 여성들을 속이고, 승진과 출마 기회를 박탈해왔다”며 비판했다. 더필드는 “트랜스 권리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제기한 여성들은 병원 병동 등에서 불이익을 받았고, 큰 대가를 치렀다”고 주장했다.
스포츠계와 여성계도 반응
여성 스포츠계와 인권 운동가들도 이번 판결을 환영했다.
전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Martina Navratilova)는 “우리는 항상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며 “이 판결을 위해 싸워온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 수영 선수이자 여성 권리 운동가 샤론 데이비스(Sharron Davies)는 “이번 판결로 스포츠, 탈의실, 성폭력 피해자 쉼터, 교도소 등 생물학적 단일 성별 공간이 법적으로 명확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종이 한 장으로 생물학적 성이 바뀐다는 건 원래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고 덧붙였다.
이경미 기자 kyungmi@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