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정부는 군 현대화와 방위력 강화를 위해 300억 달러(약 39조 원)를 투입할 계획이지만, 목표 병력을 4,700명 이상 줄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전직 호주 육군 참모총장 피터 리히(Peter Leahy) 교수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 감소가 호주군(ADF) 병력 부족의 핵심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군 생활은 국가에 대한 헌신과 봉사 정신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오늘날 호주 사회는 국가보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으며, 특권 의식과 정체성 정치, 피해자 의식이 팽배해지면서 군 복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군 복무 정신 사라지는 호주 사회
리히 교수는 최근 발표한 퇴역군인회(RSL) 보고서를 통해 “호주 정체성과 문화가 약화되고 있으며,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예전보다 낮아졌다”고 분석했다.그는 “요즘은 국가에 대한 의무보다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크다”며 “특정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오히려 ‘호주’라는 공동체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호주국방군 ADF(Australian Defence Force)의 새로운 모집 광고 역시 국가적 자부심과 전통을 강조하기보다는 직업적 혜택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변화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리히 교수는 “광고를 보면 마치 라이프스타일 광고 같다”며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군이 개인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군 복무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 그리고 충성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며 “궁극적으로 전장에서 싸우고, 필요할 경우 치명적인 힘을 행사하는 것이 군의 본질인데, ADF의 홍보에서는 이런 점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국가 정체성 약화로 군 지원율 감소
리히 교수는 2023년 발표된 사회 결속력(Social Cohesion) 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호주인의 국가 정체성이 과거보다 크게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호주 생활 방식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은 2007년 58%에서 2023년 33%로 감소했다. 또한 ‘호주 사회에 속해 있다고 느낀다’는 응답률도 2007년 77%에서 2023년 48%로 급감했다. 그는 “호주의 날(Australia Day) 논란과 같은 정체성 관련 논쟁이 지속되면서 ADF와 군 복무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분위기가 생겼다” 며 “정치인들은 이런 논쟁을 선거 전략으로 이용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기보다 오히려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고 비판했다.
엄격한 입대 기준도 문제
필립 톰슨(Phillip Thompson) 연방 하원의원(보수당·LNP) 역시 리히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며 “정부가 실질적인 병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고 지적했다. 그는 “호주에는 군에 입대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많지만, 불합리한 기준 때문에 입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은 어릴 때 천식 진단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입대가 거부됐다. 그는 지난 10년간 어떠한 약도 복용한 적이 없었지만, 군은 그의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한 여학생은 학창시절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상담 교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는 이유로 군 입대에서 탈락했다” 며 “이처럼 과도하게 엄격한 신체,정신 건강 기준이 지원자의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 주장했다.
예비군도 차별받는 현실
한편,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호주 예비군(Army Reservists) 역시 직장에서 차별과 불이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주 육군연구소(Army Research Centre)의 보고서에 따르면, 호주 예비군의 20%가 군 훈련 휴가를 지원받지 못하고 있으며, 40%의 관리자들은 군 복무 경험이 조직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한 예비군은 “고용주들은 우리가 군 훈련을 받는 것을 마치 취미나 부업처럼 여긴다” 며 “태평양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우리는 최전선에 투입될 수도 있는데,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 하소연했다.
국가 공동체 정신을 회복 시급
리히 교수는 “호주 사회가 국가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며 “국가의 미래를 위해 군 복무를 가치 있는 선택으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정치인들은 사회 결속력 강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선거 전략을 위해 정체성 논쟁을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며 “이제는 ‘호주’라는 브랜드를 강화하고 국민을 하나로 묶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