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한국신문) 정동철 기자 = 호주 시드니에서 활동하는 오페라 가수 김재우 테너가 ‘고향’을 주제로 한국가곡 독창회를 열어 400여 관객들에게 매혹스러운 감동을 선사했다.

지난 14일(토) 오후 4시 시드니오페라하우스 가까이 있는 콘서바토리움 건물 앞에는 알록달록 한껏 멋을 부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5시에 예정된 테너 김재우 독창회 ‘한국가곡의 밤’에 참석하기 위해 일찌감치 집을 나선 관객들이었다. 꽃다발을 든 사람들이 여럿 보였고 아는 이들끼리 셋씩 넷씩 모여 인사를 나누었다. 한인 교민 뿐 아니라 군데군데 호주 현지인도 눈에 띄었다. 다들 곧 펼쳐질 가곡의 향연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표정이 살아 있었다.

남반구 호주에서 9월은 마침내 물러가는 겨울과 이제 막 오는 봄이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달이다. 태양 아래서는 한여름처럼 뜨거워도 바람 불고 그늘이 내리면 초겨울처럼 쌀쌀하다. ‘한국가곡의 밤’을 앞두고 하루 종일 성가신 햇볕에 시달렸다. 마침 시드니가 주도인 뉴사우스웨일즈(NSW)주 지방선거일이라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호주에는 투표가 권리이자 의무라서 이를 어기면 벌금을 내야 한다. 늦은 오후가 되니 그제야 서늘한 공기가 땅에 깔리면서 한국 가을을 닮은 호주 봄이 쏙 다가왔다.

공연이 열리는 콘서바토리엄 베르브루겐홀은 청중으로 차 있었다. 한복을 우아하게 차려 입은 김재우 테너의 아내 배천사 씨가 한국어와 영어로 사회를 보며 순서를 진행했다.

첫 순서는 날렵한 양복에 번쩍이는 검정 구두를 신은 김재우 테너가 변은정 피아노 반주자와 함께 부르는 한국가곡 ‘그네’였다. “세모시 옥색치마” 하는 순간 마음은 허공에 유려한 선을 그리며 솟구치는 그네에 올라 탔다. 하늘만큼 푸른 소리가 정수리 속으로 깊이 박혀 들었다. 눈 주위로 뜨거운 물 테두리가 확 올라왔다. ‘그네’가 왜 이런 축축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 알 수 없었다. 이어지는 ‘동심초’는 영어로 ‘러브레터’로 번역된 노래였다.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라는 끝마디에서 김 테너는 두견새가 피를 토하듯 절창에 절창을 더하였다.

다음 순서로 김재우 테너가 단장으로 있는 시드니 노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아트팝 가곡으로 유명한 김효근이 작곡한 ‘첫사랑’과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을 연주했다. ‘첫사랑’은 순수하고 애잔한 서정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주는 듯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그리운 금강산’은 가슴 벅찬 웅장으로 시작해 아랫배를 든든하게 하는 그리움을 남겼다.

다시 무대에 오른 김재우 테너는 꿈을 잡으려는 청년의 눈빛으로 ‘남촌’과 ‘가고파’를 불렀다. 두 곡 다 ‘산 너머 남촌’과 ‘내 고향 남쪽 바다’에 대한 애틋한 향수를 담은 노래였다.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은 무조건 남쪽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당위’가 먹먹하게 다가왔다. 김 테너의 목소리에 따라 가사에 젖은 채 노랫가락에 실려 한없이 고향,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다음 순서는 발레리나 나윤주와 제자들이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상징하는 ‘만개화’ 창작무용을 선보였다.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날아다니다가 칼춤을 추는가 하면, 상모를 쓴 무용수들이 현란하게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가수 안예은이 부른 상쾌한 노래 ‘출항’에 맞춰 뒤통수에 탈을 쓰고 더덩실 춤사위를 이어갔다. 나중에는 모든 무용수가 부채를 들고 박자에 맞춰 좍좍 펼침으로써 꽃을 피우고야 말겠다는 결기로 춤 순서가 끝났다.


춤 순서가 끝나고 김재우 테너가 무대로 올라와 ‘청산에 살리라’와 ‘나물 캐는 처녀’를 불렀다. 수풀 우거진 청산 노래를 듣는데 귀가 저절로 푸르러지는 듯했다. ‘나물 캐는 처녀’는 대체 어여쁜 그 처녀가 나물을 캐는지 경쾌한 춤을 추는지 모를 정도로 흥이 났다.
이로써 1부가 끝나고 15분 휴식한 후 2부가 시작됐다.

2부 첫 순서에서 김재우 테너는 남자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와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다. 곧이어 한껏 멋스러운 매너를 구사하며 ‘님이 오시는지’와 ‘진달래꽃’을 노래했다. 오지 않는 님에 대한 가여운 기다림은 ‘진달래꽃’에 이르러 기어이 떠나려는 님에게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는 절규를 낳았다. 어린 시절 가느다란 실 몇 가락으로 얼굴 근육 깊숙이 스며 있던 온갖 감성이 툭툭 터져 나와 눈가를 일렁이게 만들었다. 퍼뜩 떠오르는 대상이 없는데도 깊은 데에서 소리 없는 울음이 우러나왔다.

조요셉 지휘자가 이끄는 시드니 코리안 남성 합창단 공연은 굵고 부드러운 남자 목소리들이 모여 질서와 균형을 잡으면 얼마나 큰 힘을 주는 지 여실히 증명했다. ‘사공의 그리움’을 부르는데 ‘강릉 가는 배’를 타고 어기여차 힘찬 항해를 하는 듯한 충일감을 주었다. ‘꽃밭에서’는 따듯한 목소리로 꽃밭으로 초대하는 친절한 남자들의 매력을 발산하는 노래였다. 무대에 선 합창단원 중에 오랜만에 보는 지인이 몇몇 있었다. 인사를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초로를 맞은 남성들만의 감성과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관객들도 열렬한 박수와 환호로 이들의 공연에 화답하고 힘을 보태 주었다.
마지막 독창 무대에 오른 김재우 테너는 ‘눈’과 ‘잔향’을 불렀다. 서정적 가사에 유려한 멜로디를 담은 노래가 그의 맑은 고음을 타고 잔잔하게 객석까지 전해졌다.
모든 순서를 마친 후 김재우 테너는 “자신에게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면서 “이번 독창회는 ‘고향’을 주제로 준비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돌아가신 아버지가 1960년대 초 연세대 성악과에 지원할 때 선택한 ‘보리밭’을 앵콜곡으로 골랐다”면서 관객들에게 같이 부르자고 청했다. 참석한 관객들이 김 테너와 ‘보리밭’을 합창하며 ‘한국가곡의 밤’ 공연이 마무리됐다.

이날 독창회에 참석한 한 중년 남성은 “모든 순서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할 만큼 매혹스러웠다”면서 “카타르시스를 통해 나 자신과 인생을 사랑할 수 있는 새 힘을 얻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공연이 끝나고 콘서바토리엄을 나오니 어둔 밤하늘에서 차가운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따가운 햇볕을 쏘아대던 봄은 어디론가 달아났고, 쌀쌀한 겨울이 돌아와 점퍼 지퍼를 목까지 끌어 올리게 했다. 이미 봄인가 하면 추워지고 아직 겨울인가 싶으면 따듯해지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하수상한 시절이다.
그대, 여전히 매혹을 갈망하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