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레
오렌지 주스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급히 얼굴을 돌렸기에 망정이지 마주앉은 사람이 다 뒤집어 쓸 뻔하였다. 마침 널찍한 바닷가라서 또 얼마나 다행인가. 요즈음 들어 자주 사레가 들린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도 그렇지만 어떤 때는 맹물을 마시다가도 튀어 나온다. 한번 시작된 기침은 걷잡을 수가 없어 입안에 든 내용물이 밖으로 튈까봐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특히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때 그렇게 되면 진땀까지 난다. 사람이 늙으면 목젖의 동작이 둔해져서 음식물의 일부가 공기의 통로인 기도(氣道) 쪽으로도 들어간다고 한다. 그럴 때 재빠르게 반사 작용이 일어나며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하여 잘못 들어간 음식물을 빠른 속도로 내치는 현상이 사레라는 것을 얼마 전에 알았다. 한때 난다 긴다 하던 시절이 무색하게 되었지만 세월이 흘러 그렇게 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랬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레가 들리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나는 좀 천천히 드시라며 짜증을 냈었다. 너무 급하게 먹는 이유가 나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해서이다. 아주 잘 모시지는 못했지만 막내아들로서 성의껏 만들어 드린 환경이 음식도 편안히 못 들 만큼 허술한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신체적 변화가 찾아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늙어가고 있었음을 나는 몰랐다. 어머니는 늙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무심했던 내가 이제는 어머니와 똑같이 사레가 들리는 나이가 되었고 그럴 때 마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도 사레가 왜 들리는지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런 신체 변화를 모른 채 살다가 세상을 버리지 않았을까. 그런 어머니를 향해 엉뚱한 타박을 퍼부은 내 불효가 생각나 몸이 오그라든다. 야속하게 면박을 주던 나를 어머니는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셨을까. 어눌한 변명으로 민망해 하던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마주보고 사죄하고 싶지만 정녕 그렇게 될 수 없어서 더욱 안타깝다. 참으려고 애를 쓸수록 더욱 심한 기침이 났을 어머니는 내 눈치까지 보느라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왜 나는 사레가 들리는 나이가 되어서야 불효를 깨닫고 뒤늦게 후회하고 있을까. 인간은 한번쯤 틀린 길로 갔다가 끝까지 가 본 후에야 되돌아서는 속성이 있다고는 해도 너무 늦은 깨달음에 후회가 앞설 뿐이다.
지금 우리 집에는 내가 사레가 들렸을 때 잔소리 할 아이가 없다. 세 아이 모두가 성장하여 나가 살기 때문이다. 그것이 홀가분하다가도 관심을 가져줄 사람이 집사람 밖에 없다는 사실이 조금 허전하게 생각될 때도 있다.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면 간섭으로 여겨 귀찮게 생각하다가도 무관심 속에 놓이게 되면 외롭다는 느낌을 받으니 얼마나 간사한가.
언제 목젖의 기능이 회복되어 사레가 멈출지 모르고 그렇게 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정상으로 될 때까지는 사레를 달고 살게 되었다. 그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사죄하며 절절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게 되리라. 오늘 밤엔 잠들기 전에 간절하게 소원해 봐야겠다. 꿈속에서라도 한번 만나 어머니에게 못 다한 속마음을 털어놓고 섭섭해 하며 혼자 울었을 어머니를 팔 베게 해드리며 위로해 드려야겠다. 마음이 울먹해서인지 느닷없이 사레기가 느껴진다. 황급히 바튼 기침으로 사레를 다스리며 내다본 창문 밖으로 겨울 빗줄기가 거세다.
이주열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