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만남은
“꼭 찾아야 해요. 죽기 전에 꼭 만나서 할 말이 있거든요.” 그녀는 오늘도 알록달록한 모자를 눌러쓰고 누군가를 찾아 길을 나선다. 빈약한 정보를 가지고 이곳저곳을 헤맨 지도 여러 날째, 실망이 거듭되자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언젠가 모 프로그램에서 오십 년 만에 첫사랑을 찾아 나선 할머니의 애끓는 사연이 소개되었다. 열여덟 살 여고생이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지만, 부모님의 심한 반대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할머니는 몇 년 전 남편을 잃고 나서 자기 몸에 찾아온 질병으로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죽기 전에 그 사람을 한 번 만나서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하루하루 힘겨운 병마와 싸우며 지쳐갈 때 첫사랑을 찾을 거라는 희망이 그녀의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름 석 자와 오래전에 살았던 주소 등 불분명한 정보를 가지고 길을 나섰다. 혹시 오늘은 만날지 모른다는 기대로 날마다 예쁘게 단장을 했다. 해 질 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지만, 다음날이면 또다시 부푼 마음으로 길을 나서곤 했다.
많은 날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수소문 끝에 그 남자의 친척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화면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희열에 들떴다. 그녀는 칠십이 갓 넘은 자기 모습이 속상하다며 부끄러워했다. 자기를 만나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긴장한 할머니 앞으로 희미한 모습의 한 남자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 앞에 바싹 와 섰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그 남자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 남자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내 눈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오래전 다하지 못했던 아쉬움과 그리움과 애달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 사람은 사별을, 또 한 사람은 기억을 잃어가는 아픔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픈 몸을 추스르며 찾아 나선 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오히려 그녀의 병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었다.
그날 나는 그들의 만남을 따라가며 내가 행복했다. 해맑은 모습으로 교정을 뛰놀며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 같았던 시절로 돌아갔다. 사랑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갈 때 나에게 다가온 사람이 기억났다. 그는 내게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한 기쁨이기도 했다. 우리는 수북이 쌓인 눈을 밟으며 음악을 얘기하고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었다.
그런데 그와의 사이에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렸던 내가 그보다는 더 흥미 있는 다른 일들에 시선을 두는 일이 많아지면서부터였다. 자연스럽게 그와 소원해졌다. 아쉬움이란 감정도 잘 모르는 채 그렇게 지내던 어느 봄날, 그에게 안녕을 고했다. 이해할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는 그 사람을 뿌리치고 돌아섰던 그 길을 나는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돌이켜 보니 어느새 시간은 흘러 사십 년이 지났다. 지난해 가족이 아파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 시간을 요양병원에서 보낼 때였다. 병원에 도착한 날 오후, 마음이 너무 착잡해 병실 문을 열고 나와 벽에 기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때 긴 복도를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내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나를 향해 “어! 너…” 화들짝 놀라 나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사십 년 전에 헤어진 그 오빠였다. 그는 그렇게도 나를 찾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단다. 선후배한테 물어보아도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고 했다. 외국에서 살고 있어 어려웠나보다고 하며 한꺼번에 여러 질문을 쏟아냈다. 어떻게 나를 알아봤냐고 물었더니 조금 전 병원에서 나가는 차 안에서 병원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병원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찾은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꼭 보고 싶었다고, 스쳐 지나가는 모습만이라도 보고 싶었다고, 숨 가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여전히 큰 눈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는 세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가슴이 계속 쿵쾅거렸다. 혹시라도 내 속이 들킬까 조바심이 났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이곳에 온 이야기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다시 도망가지 말라며 다급히 외쳤다. 병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스쳐 갔다.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에 흠뻑 빠졌던 소녀, 웃는 모습이 너무 멋있는 오빠가 마냥 좋았던 소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내 젊음을 묶어 둘 수는 없었다. 그때 나의 시선은 너무 먼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고, 소녀의 꿈은 더 큰 세상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었으니까.
잠시 후, 볼일을 마친 그가 병실을 다시 찾아왔다. 한국에 있는 동안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다. 우리는 자연스레 다음날 카페에서 만났다. 아메리카노와 카푸치노를 시키고 여름 햇살이 창가에 드리는 자리에서 사십 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함축해서 나누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지난 사십 년은 물론 젊은 날의 아름다웠던 순간들까지 더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와 나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정치 철학은 물론 하물며 음식 취향까지. 오랜 시간 다른 삶을 살아와서일까,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 그와 나는 아주 가끔 카톡으로 그저 평범한 안부를 주고받고 있다. 만나기 전에 가졌던 기억이나 설렘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내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그저 그런 인연 중의 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차라리 그날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물론 그가 내 첫사랑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나의 진짜 첫사랑을 영화처럼 만나는 어느 날의 장면을 비밀 아닌 비밀처럼 상상하며 살고 있다.
창밖으로 바람 소리가 거세다. 이 계절이 영원하지 않듯이 아무리 거센 바람도 반드시 잠잠해진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