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얼굴
1
산방산 아래 너를 붙잡아 두는데 필요한 건 하루나 이틀쯤이었다
넌 뛰어오르는 물고기, 난 날아다니는 물새로 우리를 슬퍼하지 않았을 것, 애초에 내가 거기였더라면,
두 팔을 힘껏 벌려 절소리波濤를 잠재우고,
두 발을 있는 대로 버텨 강쳉이暴風을 막았을 것이다
한 달만 참았다가 나 만나기로 했잖아
어디서든 돌담처럼 엎드려 밥 먹을
때처럼 나타나기로 했잖아
얼비치다 번져간다 스며든다
문이 닫히면 틈을 보라고
틈에 끼어있는 숨을 꼭 붙잡으라고,
놓칠 계획은 애초에 없던 노래
누더기 솔기처럼 그때까지 몰랐다
사랑아, 먼지 한 알이어도 잡았을 것이다
사랑아, 한 방울의 물이어도 놓치지 않았
을 것이다
얼비친다 번져간다 스며든다
싱싱했다 버텼다 숨을 놓았다, 쓸모가 없다, 애초에 쓸모없는 생이란 없는 것인데도
긁어도 긁어도 가려운 계절, 3월에는 성급히 온 꽃잎들이 스러지듯 떨어진다
봄이 뒤돌아서서 손을 흔든다 멀리 달아나는 봄, 텅 빈 봄, 다시 오지 못할 너의 봄
누군가 한 번 더 문을 두드려주었더라면
누군가 한 번 더 틈을 들여다보았더라면
2
때 늦은 눈, 눈꺼풀이 떨릴 때마다
펄펄 슬픈 눈이 얼굴에 내렸다
만약에, 그때
사람들이 모두 넘어져버리면 좋겠어 라던 적의敵意, 네가 아플 때 일이다
약을 입에 털어 넣을 때마다 고양이처럼 울며, 아무리 벽을 긁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고
너의 만약에가 자란다면 백번이라도 대신 넘어주고 싶은 적 있었다
내 만약에를 떼어, 너에게 나누어주고도 싶었다
붕어빵을 먹을 때마다
막걸리를 마실 때마다
너는 훌쩍거렸지
만약에는 누르는 힘이
만약에는 참아내는 힘이 있을 것 같다고
넘어지지 말라고 너의 잠든 등에
내 등을 포개어 놓고 돌아왔다
붕어빵도 막걸리도 잘 넘어갔을까 그때,
네가 가고, 나는 너처럼 훌쩍거렸고
너처럼 나도, 누군가 돌담처럼 무너져버리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내 만약에가 다시 자라는 데 아주 오래 걸렸다
나는 한 시절, ‘만약에’에 기대어 살았다
시작노트
가버리고 없는 날들, 빈자리가 아니었다. 생각도 그리움도 바닥에서 점점 키를 높여갔다. 가던 발걸음조차 무심히 불러 세우는 힘, 유리병에 넣어둘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한 줌의 힘, 그토록 동동거리던 발걸음과 시간들, 그 점성이 이토록 찰지다니, 가끔 식은땀으로 내게 와서 흘러내리기도 했다. 누군가 땀으로 물을 준 꽃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는데, 또 누군가 ‘먹먹한 슬픔 위에 피는 투명한 꽃’이라고 애도를 했는데, 투명한 짠맛이었구나 너는, 오래된 그리움이 죽은 척 엎드려 있다가 다시 꽃으로 핀다는 것, 피가 섞이지 않았으면 어떻게 믿으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