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돈 내라면 낼 거야
요즈음 나에게는 사 개월 전 첫 손녀가 태어나면서부터 손 전화기에 온 마음이 기우는 새로운 버릇이 생겨났다. 손녀가 삼 개월을 지나면서부터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첫 아이를 낳은 딸은 귀여운 자식의 변하는 모습을 하루가 멀다 하고 보내오고 있다. 손녀의 영롱한 눈속을 들여다보노라면 할미의 마음은 사랑이 샘물처럼 솟아오른다. 마를 줄 모르는 이 샘물은 날이 갈수록 흘러넘치고 있다.
7년 전 일요일 아침이었다. 교회에 가야 할 시간에 남편과 나는 캔버라 병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밤늦게 낯선 외국 청년이 다급하게 걸려온 전화선을 타고 딸의 입원 소식을 전해주었다. 어디가 얼마나 아픈 것인가, 병원에 입원까지 하다니… 밤새도록 병원에서 지냈을 딸을 생각하니 가슴만 타 들어가고 멀뚱히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마음과는 달리 광활한 대지 위에 양떼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내 조바심을 감지한 남편이 한마디 했다. “괜찮을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 아버지인 그이인들 마음이 편하겠는가. 시드니에서 캔버라까지는 빨리 달려도 3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지만 그 날은 왜 그리도 먼지 조바심으로 오금을 펼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차가 더 좁게 느껴졌다. 이미 내 가슴은 새까맣게 타 들어간 후에 병원에 도착했다. 핼쑥한 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지만 딸의 옆에 앉아 있던 젊은 호주 청년이 신경이 쓰였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동료라고 스스로 자기 소개를 하였다. 그 많고 많은 동료들 중에 남자직원만 있단 말인가. 뿐이랴, 이 호주 청년은 뽀얀 피부에 갓 사회 초년생인 듯 딸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한 번 얼굴을 익힌 그 청년과 딸은 수시로 시드니의 우리 집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찾아오니 잠자리며 음식 또한 대접해야 하는 일이 큰 숙제로 다가왔지만 딸의 얼굴을 봐서 정성껏 대접해서 보내곤 하였다. 그럴 때 마다 아들은 그들이 붙어다니는 걸 못 마땅해 했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좀 지나친 거 아니냐고 지청구를 하였다. 아들의 사고방식은 조선시대의 샌님과도 같았다. 그러나 저렇듯 서로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어미인 나로서도 어찌해야 할 방도가 선뜻 서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살며시 다가와 이야기하였다. 당신이 만들어준 된장찌개는 세계 최고의 음식이라며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 올렸다.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들 중 된장찌개를 가장 좋아한다니 나로써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그 동안 지켜본 그 청년은 볼수록 하는 짓이 내 눈에는 듬직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된장찌개를 비롯해 내가 만들어 준 음식들을 아주 맛있게 먹어댔다. 나 또한 그 애들이 올 때마다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였다. 그런데 웬 일인지 그렇게 한 두 해가 가고 몇 해가 지나가도 결혼 이야기는 아예 없었다. 딸의 나이는 삼십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의 속마음은 숯검댕이처럼 타 들어가고 딸 가진 엄마의 조바심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캔버라에서 마침내 결혼 날짜를 통보해 왔다. 그 동안 괜스레 안달한 꼴이 멋적게 허물어진 꼴이었다.
작년 이맘때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딸의 임신 소식을 알렸더니 이제 손주자랑 하는 사람은 돈을 내고 해야 한다고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래 돈 내라면 낼 거야, 한 마디로 쏘아 붙였지만, 내 속 마음은 얼마든지 돈을 내고라도 자랑할 이유가 있다. 방긋방긋 웃는 손녀를 본다면 누구라도 똑 같은 마음이리라. 다시금 손 전화기에서 ‘까톡’ 소리가 울려댄다. 급히 열어보니 화면 가득 손녀의 호수같이 커다란 눈이 일렁이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보고 또 보고 안경알을 연신 닦아대며 해 맑은 호수 속에 빠질 듯 들여다본다. 어디서 요렇게 예쁜 천사가 우리에게로 왔을까.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자꾸만 보고 싶은 손녀의 호수 같은 눈! 그만 앙 깨물어 주고 싶어진다.
김인호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