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꿈
절대로 흥분하지 말고 침착해야 한다. 평소와 같이 평온한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해 본다. 제일 먼저 네가 떠오른다. 시드니에서 성공한 비즈니스 우먼이 되어 한국 나들이 때마다 날 찾아 왔었지.
내 아들이 유학 와서 혼자 지낼 때 먹이고 보살펴주어 안심할 수 있었고 우리 가족이 이민 와서 적응하느라 힘들 때 꽃다발 안고 손수 만든 음식 잔뜩 싸들고 나타나 날 격려해 주곤 했었지. 이젠 제발 좀 잊어버리라고 신신당부해도 아직까지 장장 28년 동안 생일카드와 선물로 날 감동시키는 너. 놀랍고 행복하지만 어떻게 무엇으로 그 정성과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까 늘 고민이다.
어느 날 네가 어김없이 보낸 생일카드 속에 로또 한 장이 들어 있었지. 전혀 기대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시간이 흘렀는데 하루 전날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선 너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다. 교회가 없어서 이스트우드 도서관 뒷방에서 젊은이들을 위해 사역하는 겸손한 목사에게 작은 예배터를 마련해 드려야겠다. 또 장로와 교인들의 핍박에 무릎 꿇고 쫓겨난 시인 목사에게는 시집도 내고 아름다운 목회를 할 수 있도록 후원해 드리고 싶다. 멀쩡한 직장을 접고 캄보디아에서 선교 활동하는 조카에게 선교자금 듬뿍 안겨주어 맘껏 펼치라고 해야겠다. 청년들에게 올바른 신앙관을 심어주는 화가 목사님이 꿈꾸는 장학기금도 지원해 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리고 나를 위해 예쁜 수필집 한 권 내고 싶고, 평생 숙제인 개인전도 열었으면 좋겠다. 나를 항상 태우고 다니는 남편에게 멋진 스포츠카 한 대를 선물해야 섭섭해하지 않을 것 같다.
제각기 잘살고 있는 자식들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오매불망 보고 싶은 내 사랑 나의 뮤즈 첫손자는 데려와야겠다. 차도 집도 사 줄테니 시드니로 돌아와 내 곁에서 살자고 억지를 부려야겠다. 요란한 팡빠레가 울리고 화려한 폭죽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상상만해도 아름다운 불꽃 속에 펼쳐지는 즐거운 잔치로 신바람이 난다. 대접해야 할 분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오랜 동안 투병중인 나를 위해 기도해준 교회 식구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준비하고, 주일마다 나를 감동시키는 악대와 찬양팀과 찬양대에는 특별선물로 기쁘게 해주어야겠다. 한약 먹여 손수 재배한 채소를 깨끗이 다듬어 보내주고, 오가닉 케익을 만들어 냉동칸에 쌓아두고 먹게해 준 동문부부, 항상 염려와 기도로 응원해 주신 동문들께는 모임 때 골든벨을 울려 보답해야겠다. 이 먼 곳까지 무거운 건강식품을 싸들고 찾아와 격려해준 문우들과 오붓하게 식사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울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우리 시드니 작가회 열 번째 동인지 출판기념회도 성대하게 베풀고 싶다.
나의 사춘기는 짙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천리타향에서 세 모녀는 눈물겨웠다. 중학교 입학식 날 가게를 지켜야 하는 엄마가 안 보여서 서운한 게 아니였다. 상급생 언니들이 예쁘게 생긴 신입생들을 뽑아서 S형제를 맺고 즐기는 이상한 전통에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주눅들지 않고 꾸준히, 열심히 나의 길을 달려왔다. 20대의 열정은 창작에 쏟았고, 십 년 이상 10대 소녀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고, 아이 셋 낳아 최선을 다해 정성껏 키웠다. 중년에 이민 와서 혹독한 광야의 시련을 통과하면서 드디어 나에게 그렇게 부럽던 S언니가 선물처럼 다가왔다. 아쉬운 거 남부러울 거 없는 우아한 언니가 나 때문에 자주 눈물을 글썽인다. 내 모든 필요를 채워주고 어쨌던 입맛을 찾아주려고 맛집을 두루 헤매다닌다. 가슴가득 차오르는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아우야 네가 보이지 않으면 내가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속히 건강 회복해서 곁에만 있어 줘”. 진심으로 당부하던 언니의 모습에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았다. 포근한 친정엄마의 애절함을 느꼈다. 거액의 로또 당첨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결한 벽에 부딪혀 주저앉고 말았다.
날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다. 한여름밤에 뜬 눈으로 꾼 꿈은 그냥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아끼고 감동시키고 기쁨을 안겨주고 행복하게 해주었는지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어서 고맙다. 차곡차곡 쌓여있던 기억 보따리를 풀어보니 나의 삶이 온통 귀한 분들과 함께한 성대한 잔치였다.
그런데 뻔히 알면서도 로또를 찾아들고 미련을 못 버리고 개점시간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이 우습다.
박조향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