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칠십이 넘으면 동서양 국적을 불문하고 지독하게 말을 안 듣는다니까. 네가 내 가족이면 멱살 잡고 끌고 가겠는데∙∙∙ 휴우∼ 자∼ 보스 네가 결정해라’.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앰뷸런스 대원의 서슬에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에게 눈짓했다. 응급처치 후 스스로 괜찮다고 고집을 피우던 남편이 계속되는 구토로 결국 이동식 침대에 실려 가고 있다. 젊어선 독일제 탱크처럼 튼튼하다고 큰소리치더니, 60대에는 혈관 나이가 40대라고 자랑하다가 요즘은 몸에 좋다는 양파즙, 홍삼 등 온갖 즙을 달고 사는데∙∙∙ 맥 놓고 축 늘어져 실려 가고 있다.
무더위에 시달려 기진할 즈음, 단비가 내리는 2월의 마지막 주말 아침. 동문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빗길에 두 시간을 달려 예식장에 도착하고 보니 아무도 없다. 늘 이런 식이다. 평생을 어떤 모임이건 너무 일찍 가서 우두커니 멍청하게 기다리는 그 시간이 아깝고 싫다.
오늘도 역시 시작도 하기 전에 나는 이미 지쳐가고 있다. 정성스레 준비된 야외 예식장은 화사하고 아름다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엄습하는 한기에 실내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 폭우도 아니고 시름시름 내리는 비가 이렇게 기온을 떨어뜨리다니 신기하고 야속하다.
지병으로 체온조절이 원활하지 못해서 늘 두꺼운 숄을 들고 다녀야 한다. 오래간만에 정장을 하느라 그걸 잊어서 지금 뼛속까지 시려 오는 고통을 겪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도 행복한 결혼식은 축복으로 가득 넘치고 사진 촬영이 계속되는 동안 음료수와 안주가 푸짐하게 제공된다. 맛있는 냄새와 향긋한 와인 향이 분위기를 돋우어 너도나도 열심히 먹으면서 즐긴다. 드디어 연회장 문이 활짝 열리고 모두 배정된 좌석에 앉는다. 코스 요리가 천천히 나오는 동안 성질 급한 남편이 마른 빵을 자꾸 뜯어 먹는다. 천천히 먹으라고 했더니 ‘바로 이 맛이야!’ 자기가 좋아하는 빵이라고 계속 먹는다. 젊은 시절 해외출장을 다닐 때 먹었던 빵 맛을 지금 여기서 만나 ‘추억을 씹고 있었나 보네’, 그래서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커다란 접시에 돼지고기 요리를 보더니 남편이 비위가 상한다고 슬며시 일어난다. 잠깐 바람 쐬러 나갔으려니 생각하고 식사를 계속하고 있는데 우아한 혼주가 날 좀 나와 보란다. 멀쩡하던 남편이 테라스에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신랑 들러리들이 발견해서 턱시도 입은 채로 응급조치를 다 해 놓은 상태다. 이미 앰뷸런스도 불러놓고 토해낸 오물도 깨끗이 씻어 치우고 보살피는 솜씨가 범상치 않다.
너무 놀랍고 고마워서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신랑 친구들이고 드림 스튜디오 대표라고 옆에서 거들던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 호주에 살면서 어린이와 노약자, 여자를 우선으로 돕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격하게 감동받고 몹시 부러워했는데∙∙∙ 지금 내 눈앞에 턱시도를 입은 멋진 한국 청년들이 마치 구급대원들처럼 민첩하고 친절하게 보살펴 주어서 매우 고맙고 기특하고 자랑스럽다.
앰뷸런스로 향하는데 조용히 중요한 일은 혼자 다 하더라고 칭찬 듣던 청년이 내게로 다가왔다. ‘병원 가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주세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 후두둑 떨어진다. 놀란 가슴에 불안과 공포와 수치심이 뒤엉켜 명치에 뭉쳐 있었나 보다. 끝까지 따뜻하고 자상한 배려에 참았던 감정이 복받쳐 펑펑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앰뷸런스 대원이 담요를 덮어주며 어디 아프냐고 내게 묻는다. 아침부터 간절히 원하던 담요를 덮었는데 청년의 전화번호를 꼬옥 끌어안고 있는 가슴이 더 훈훈해 온다. 추위와 피로감도 사라지고 마음 한가득 든든해지는 걸 느낀다. 남편의 심장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 입원을 해야 할 거라는데 나는 아름다운 청년 다니엘의 전화번호를 부적처럼 소중하게 붙들고 있다. 입력해준 버튼을 누르면 슈퍼맨 처럼 달려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평화롭다.
지금까지 내 삶을 기적처럼 지탱해준 에너지의 원천은 바로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남에서 빚어진 거라는 걸 깨닫는다. 인간이 누군가를 돕고 섬길 때 세상과 자기 주변과 자신 안의 빛이 더욱 밝아져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 모두의 가슴속 깊이 사무치게 한다.
조동화 시인의 작은 실천에 큰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되는 밤이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박조향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