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내가 명화를 분별할 남다른 안목이 있다기보다는 그림을 대할 때마다 새로운 이미지로 나에게 이야기를 걸어오기 때문이다. 그림은 누가, 어떤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느냐가 가치를 매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림의 작품성뿐만 아니라 소장가가 바뀌어가는 사회적 가치를 겪으면서 그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도 한다.
호주 이민 초기에 가라지 세일 광고를 열심히 읽었다. 호주인들에게 외면당하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가라지 속에 숨어있는 보물을 찾아 기웃거렸다. 한국 전쟁에 참여했던 호주인 용사의 창고 안에 실크에 그린 박수근의 초상화가 혹시나 곰팡내를 풍기며 자고 있지는 않을까 상상하면서…
가정집에 청소부를 소개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집을 방문했다. 전화 한 통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나는 고집스럽게 찾아다녔다. 전화로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노’라고 할 때 짧은 영어로 설득하기가 힘든 이유도 있지만 내 눈으로 고객의 집을 보고 싶어서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견적을 내기 위해 집의 조건들을 살펴보는 것보다 벽면에 눈이 먼저 가곤 했다. 정면 얼굴보다 옆모습이 사람의 희로애락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했던가. 방바닥에 놓인 가구나 장식품보다 벽면은 주인의 개성과 취향과 성품을 은근하지만 확연하게 보여준다고 나는 믿고 있다. 엽서 크기만 한 그림 한 점에도 주인의 추억과 애정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그림을 화제로 삼으면 주인은 마음의 빗장을 자신도 모르게 풀어놓게 마련이다. 허전한 벽면을 채우고 있는 이발소 스타일의 그림일지라도 애정 어린 눈길이 가고 의미를 부여하면 빛 속으로 성큼 걸어 나오게 된다. 나는 손님의 집에서 무심히 걸어둔 그림에 스토리를 입혀준다. 그러면 벽지처럼 걸려있던 그림은 주인의 애장품이 된다.
나는 지인한테서 K 화백의 그림을 샀다. 지인은 나에게 K 화백의 다른 그림을 팔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회계사 아내가 그림을 그리러 다닌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세금 신고하러 갔다가 그림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되었다. 회계사 부부의 눈빛이 어색해서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나는 그림을 살 수는 있어도 팔아줄 만한 깜냥은 못되지 싶었다. 다행히 내가 속한 문학회 회장님이 갤러리 관장과 친분이 있었다. 애보리진 그림을 일본에서 전시할 때 통역을 한 것이 인연이 되었단다. 우리가 찾아간 날 관장인 마리아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중국전의 여흥을 음미하고 있었다. 내가 산 K 화백의 그림과 70년대 후반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시되었던 K 화백의 작품이 수록된 두툼한 화집을 풀어놓았다. 마리아의 눈빛은 흥행을 예감하듯 반짝거렸다. ‘고객들의 반응이 좋으면 홍콩에서도 전시하겠다’라는 갤러리 전속 큐레이터의 말에 마음은 홍콩의 푸른 하늘 위를 날고 있는 듯 들떴다. 나는 지인에게 미술관 관장을 만난 것과 홍콩 전시도 가능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날렸다.
지인의 아주버님인 K 화백은 호흡이 다 할 때까지 예술혼을 그의 작품에 쏟아 부었다. 가족조차도 그렇게 많은 유작을 남긴 걸 알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다. 생전에 그의 그림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관공서와 이름을 대면 알만한 건물에는 그의 대작을 앞 다투어 내어 걸었다. 그의 그림이 시드니에서 전시되어 교민과 호주인들이 힘찬 터치와 색의 향연이 품어내는 추상미술의 마력에 빠져들 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 나는 당장 지인에게 전시할 그림의 사진, 크기, 받고 싶은 가격을 담아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대관료와 전시 기간은 USB에 담겨온 내용을 보고 조율을 해도 되겠지. 그러나 기대와 달리 소식이 없었다. 그림을 팔 기회를 얻도록 바쁜 시간을 쪼개어 시티를 오갔던 우리의 진심은 뒷말로 돌아왔다. ‘아주버님 그림을 가지고 큐레이터가 되려고 설친다, 대관료만 바가지 쓰게 될 것이다’…
오십여 년 동안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이루어 놓은 K 화백.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힘은 가난했던 시절 왕복 사십 리나 되는 시골 학교를 오가며 길러진 강한 체력이 예술적 영감과 만나면서란다. 강렬한 색채와 터치가 굵은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가 쏟아 부은 에너지가 나에게 전달되는 듯 소름이 돋는다. 실력 그 자체로보다 스펙과 출신 배경이 끊임없이 예술가로서의 그의 앞날에 발목을 잡았었다. 프랑스 유학은 고질적인 학벌, 배경을 넘어 그의 예술관을 더욱 넓고 깊게 승화시켰다. 80년대 이후 그의 작품들은 ‘무제’로 일관했다. 작품에 무제를 붙인 것은 감상자 개개인이 다른 느낌을 받고, 다른 것을 발견하며,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창의적인 환희를 경험하는 것을 제목이 주는 관념이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리라. 그는 생전에 ‘작가는 그림을 완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잠시 작업을 그쳤을 뿐이다’라고 그림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 해왔다. 그래서 작품의 완성을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두기에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마치 처음 대하는 것처럼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보는 사람의 감성에 따라 백만 가지 이미지를 자아내는 화백의 예술혼에 푹 젖어들 수 있는 관람 기회가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느라 아쉽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 지인으로부터 큐레이터가 되려고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받더라도 전시회를 열도록 설득해야 했었는데…
화백이 가신지 십 사오 년이 되어 가는데 십여 년 전 유작전을 끝으로 대작들이 얼굴을 마주 보고 아직도 어두운 창고 속에 갇혀 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의 생명력을 뿜어내는 유작들이 답답한 창고를 박차고 나오는 날을 그려본다.
송조안 /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