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킨대학교 연구팀, 심각한 정신건강 등으로 연간 GDP의 3% 증발
호주 공영 ABC 방송이 매년 호주인들의 다양한 주제로 삶과 의식을 알아보는 ‘Australia Talks National Survey’의 조사 항목 가운데 ‘차별’ 주제는 매년 빠지지 않는 분야이다. 올해 조사(지난해에는 전염병 사태로 실시되지 못함)에서도 호주인들은 사회 전반의 차별 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한국신문 1449호 참조).
아프리카계 저널리스트의 경험
거대 미디어 회사에 근무하는 A씨는 첫 편집회의에서 자신이 준비한 몇 건의 기사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나 60대 백인 상사는 그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다른 편집국 직원들이 A씨의 기획에 좋은 반응을 보이며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A씨는, 처음에는 본인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새로 입사한 직원이었고, 너무 과격한 주제를 선정한 때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몇 차례의 편집회의를 함께 하면서 A씨는 같은 패턴을 발견했다. 직속 상사가 자기만 배제한다는 것을.
60대 백인 상사를 만나기 전, 그는 언론 분야에서 많은 경험을 했고 좋은 평가를 받은 기획기사를 다수 선보인 바 있다. A씨는 자기의 기획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음을 상사에게 확신시키고자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나중에 A씨는 상사가 자신의 편집 아이디어를 믿고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에게 말을 걸거나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는 직장 내에서 투명인간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A씨는 그의 편집부서 전체에서 유일한 아프리카계 이민자였다. 오랜 미디어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새 회사에서 받는 대우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A씨의 상사는 부서 내에서 A씨를 배제하려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대부분이 20~30대 백인인 직원들은 상사의 지시를 따랐다. A씨는 그렇게 직장 내에서 소위 ‘왕따’라는 것을 당하고 있었다.
A씨는 직장으로 출근하는 것 자체가 끔찍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회사 인사부에 자문을 구했지만 그의 걱정은 가볍게 무시됐다.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증이 시작됐고, 그런 자신이 너무 혼란스러워 인종차별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A씨는 그 트라우마가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10개월 후, 인사부와 몇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회사 측에서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않자 그는 조용히 회사를 퇴직했다.
“인종차별은 모두의 문제”
A씨가 직장에서 겪은 경험은 비단 A씨 및 가족만 희생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 한 연구는 우리 사회의 여러 차별이 전체 경제 부문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빅토리아(Victoria) 주, 디킨대학교(Deakin University) 연구원인 아마누엘 엘리아스(Amanuel Elias) 박사는 최근 ABC 방송 전국 라디오(ABC RN)의 ‘The Money’ 프로그램과의 대담에서 “사람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인종차별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영향도 있다”는 그는 “일반적으로 생산성 및 재능 손실과 관련된 비효율성의 근원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엘리아스 박사와 그의 동료 인 파라다이스(Yin Paradies) 교수는 인종차별로 인한 호주의 경제적 손실 부분을 연구하고 있다. 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인종차별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타격을 포함해 이의 경험과 관련해 심각한 영향이 있다.
엘리아스 박사는 “연구 결과, 호주 내 인종차별로 인해 우리 경제는 매년 GDP의 3%를 잃고 있다”며 “이는 호주의 전체 경제 부문에서 연간 370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이라고 강조했다.
엘리아스 박사팀 연구에 따르면 인종차별을 경험한 이들은 불안, 우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및 기타 여러 심리적 장애를 포함해 최소한 11가지 정신질환에 의해 불균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또한 심장병이나 당뇨와 같은 신체적 질병과도 관련이 있다.
인종차별의
직-간접적 비용은 얼마?
엘리아스 박사는 인종차별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이를 경험한 이들이 부담하는 의료비나 보험료 등 직접적인 비용, 인종차별을 경험한 사람이 근무하는 기업의 생산성 차질, 결근 및 업무성과 저하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간접비용, 그리고 무형이 비용이 있다. 엘리아스 박사는 “이 무형의 비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무형의 비용은 본인 부담금과 같은 직접 비용의 관점에서는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우울증이나 불안감 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진 이들은 개인적으로 큰 부담을 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무형의 비용은 조기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번 연구를 통해 엘리아스 박사 연구팀은 “호주사회 전반의 차별과 관련해 정부가 이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면서 “또한 이로 인한 경제적 비용을 지적하는 것은 변화를 위한 설득력 있는 제시”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인종차별의 경제적 영향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더 나은 정부 정책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그는 “정책입안자나 정부 실무자들은 인종차별에 맞서려는 비용 지출에 필요한 증거 자료를 원한다”며 “이에 대한 데이터가 나온다면 정책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엘리아스 박사는 “모든 이들이 인종차별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란다”며 정부 책임자들이 이 문제를 면밀히 검토하고, 궁극적으로는 차별 문제와 이것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
회사를 그만 둔 A씨는 부서 내에서의 차별 경험을 되돌아보며, 만약 회사 인사부에서 자신에 제기한 사안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하곤 한다. 만약 회사가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였다면 회사는 조직 문화를 해치는 회사 내 인종차별과 무의식적 편견에 대해 모든 직원과 대화를 시작할 기회가 됐을지도 모른다.
회사는 A씨 부서의 백인 상사에게 회사 정책은 물론 회사 내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녀에게 상기시켰을 수도 있다. 회사는 그 이상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은 모두의 손실이 됐다.
김지환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