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의 힘’ 만들어내는 회장단이 필요하다
요즘 시드니 한인사회에서는 한인회장 선거열기가 제법 뜨겁다.
근 10여년 동안 한인회장 하겠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단독출마, 혹은 ‘형님/아우 먼저’ 하는 아름다운(?) 양보로 무투표 당선이 되거나 그저 가볍게 진행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후보자가 4명이나 등록을 했고, 더욱이 그중 여성 후보가 2명이라는 사실도 한인사회 역사상 처음이다. 호주에서 줄리아 길라드 연방 총리가 나왔고 한국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등장하더니 과연 호주 한인사회에도 여성대표의 시대가 열릴지 궁금하다.
이번 선거는 전임(제33대) 강모 한인회장의 단독출마 연임 당선(제34대)을 둘러싸고 ‘회장 후보자는 한인회비를 2년 동안 계속 납부한 자여야 한다’라는 당시 선관위의 후보 자격조건 관련 시비가 벌어진 뒤 무슨 비상대책위원회가 세워져 임시총회를 열고, 소위 ‘탄핵’ 및 당선무효를 결의하는 등 몇 달 동안 시끌시끌하다가 다시 치러지는 재선거라서 더욱 관심이 쏠린다. 새로이 구성된 선관위에서는 이미 이번 선거를 ‘34대 선거’라고 공고한 바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10여 년 동안이나 괸심이 높지 않았던 한인회장 자리에 왜 갑자기 지원자들이 몰리는 것일까? 한인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갑자기 뜨거워졌단 말인가? 한국정부가 최근 재외동포재단을 재외동포청으로 승격시켜서 해외 동포들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한인회장의 명예가 더욱 높아지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특별 혜택’이라도 있는 것일까?
투표일이 오는 9월23일이니까 이제 채 한 달도 안 남은 셈인데 과연 한인회장에는 어떤 사람이 어울릴까? 우리는 누구를 찍어야 할까? 그 대답을 위해서 먼저 호주에서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에게 ‘한인회’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첫째로, 한인회는 본질적으로 ‘친목’ 단체다. 무슨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고, 호주라는 낯선 땅에서 한인들끼리 서로 돕고 살자고 모인 단체라는 말이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을 대표하기에 호주정부나 한국정부에서 호주 한인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면 제일 먼저 한인회를 찾고, 때로는 양국의 지원금도 받고, 정치인들이 한인회 행사장에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따라서 한인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갖고 있다.
셋째로, 호주 한인들의 삶의 현장은 호주다. 한인회는 호주정부에 등록된 단체이며 호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현황과 이슈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인들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국면이 닥쳤을 때 소화를 잘 해낼 수 있다. 굳이 따지자면 한인회에게는 호주가 먼저고 한국이 나중이다.
따라서 한인회야 말로 호주 한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목소리를 한호 양국, 특히 호주 정부에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통로라 할 수 있고, 또한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대변인이자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주는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단체이다.
그런 이유로 한인회장에는 이런 사람이 어울린다.
첫째, 능력 있고 도전정신이 있는 사람이 좋다. 아직도 호주 정계에서 설치는 One Nation 당의 폴린 헨슨이나 이제는 사라졌지만2000년대 초반 AAFI (Australians Against Further Immigration) 당의 극우 견공(犬)들이 라디오 방송이나 TV 토론회에 나와서 반아시안 인종차별을 부추키는 토론 등이 있을 때 해당 프로그램에 나가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대응할 수 있는 유능하고 적극적인 한인회장이 아쉽다. 스스로가 못하면 하다못해 운영위원회 조직을 제대로 구성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그 정도의 능력과 의지는 있어야 한다.
둘째, 한국 사정은 몰라도 호주의 정치현황, 경제추세, 사회실정, 문화수준 정도는 꿰고 있는 안목과 지식을 갖춘 호주통이어야 한다. 그래야 오늘을 살기에 급급한 이민 1세대와 한호 양국의 문화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이민 2세대를 함께 아우르고, 또한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사는’ 방향을 제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셋째, 한인회장이 되면 기부금을 한 백만불 내겠다는 사람보다는 한인회비를 매년 백만불씩 걷겠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현재 한인회는 존재 이유를 납득시키기 어렵다. 하지만 대다수 한인들이 일상생활에 유용하고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한인회비 정도는 가볍게 낼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래야 집단의 힘이 발휘되고 그 집단의 앞날이 밝아질 수 있는 것이다. 한인회장이라면 ‘꿈은 이루어진다’ 말하기 전에 꿈부터 꾸어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출마한 회장후보들 중에 이러한 포부와 능력과 의지를 갖고 오로지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순수하게 헌신하는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 회장 후보들의 정견발표 날짜가, 더 많은 한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주말이 아니라 금주 화요일 낮에 열렸는데도 이를 항의한 후보가 하나도 없었다니 실망스러울 뿐이다. 이제 한 달 후면 정해질 한인회장은 모쪼록 이 글에 언급된 내용을 잘 참조하여 젯밥 보다는 염불에 관심을 두고 한인회를 운영해 주기를 부탁드린다. 사실 한인회는 시드니 한인 동포들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우리 얼굴에 침을 뱉기보다는 그 얼굴을 자랑스러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기태 / 한국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