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라 의회 연설 마친 군주에게 “당신은 우리의 왕이 아니고 주권자도 아니다” 소리쳐
자유당 의원들, 소프 의원의 돌발 행동 ‘비난’… 11월 의회 개원시 제재안 ‘지지’ 밝혀
호주를 방문한 찰스 3세(King Charles III) 국왕이 느닷없는 봉변을 당했다. 지난 10월 21일(월) 캔버라 의회 연설을 마치고 그레이트 홀을 나서던 국왕을 향해 무소속 리디아 소프(Lidia Thorpe) 상원의원이 군주를 부정하는 발언을 쏟아낸 것이다.
이에 대해 자유당 고위 의원들이 소프 의원에 대해 ‘비난 동의안’(censure motion)을 검토하고 있다고 다음 날인 22일(화), 시드니 모닝 헤럴드가 전했다.
소프 의원의 돌발 행동은 이날(월) 의회 연설을 마친 찰스 국왕이 의회 그레이트 홀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소프 의원은 국왕 앞으로 나아가 군주의 주권을 부정하며 (원주민) 대량 학살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프 의원은 “당신은 우리의 왕이 아니다. 당신은 주권자가 아니다”(You are not our king. You are not sovereign)면서 “당신은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우리 땅을 돌려달라. 당신이 훔쳐간 것을 돌려달라. 우리의 뼈, 아기들, 우리 종족. 당신은 우리 땅을 파괴했다. 우리에게 조약(treaty)을 달라. 우리는 그 약속을 원한다”(You committed genocide against our people. Give us our land back. Give us what you stole from us – our bones, our skulls, our babies, our people. You destroyed our land. Give us a treaty. We want treaty)고 소리쳤다.
그녀가 말한 ‘treaty’는 과거, 원주민 학살을 벌인 것과 관련해 평화와 정의 회복을 위한 법적-정치적 약속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해프닝을 전한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다수의 자유당 의원들이 다음달(11월) 의회가 다시 개원할 때 비난 동의안을 고려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자유당 린다 레이놀즈(Linda Reynolds) 의원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소프 의원의 돌발 행동에 크게 놀랐다”면서 “선출 대표가 된다는 것은 의회의 존엄과 존경을 유지하는 큰 책임이 따른다”며 소프 의원의 행동을 비난했다. 이어 “상원에서 그녀에 대한 비난 동의안을 지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유당 가스 해밀턴(Garth Hamilton) 하원의원은 당 내부에서 소프 의원을 제재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임을 확인한 뒤 “소프 의원은 스트립 클럽 밖에서나 할 법한 행동을 왕 앞에서 했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자유당의 한 고위 직원도 다른 두 명의 여성 상원의원(자유당)이 비난 동의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방 상원 규정에 따르면 의원의 행동이 의회 밖에서 발생하더라도 이(비난 동의안)를 제출할 수 있다. 가장 근래의 사례는 무소속이었던 전 프레이저 애닝(Fraser Anning) 상원의원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의 한 모스크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2019년 3월 15일)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 유혈 사태의 진짜 원인은 무슬림 이민”이라고 주장한 데 대한 것이었다. 당시 이에 대한 상원 비난 동의안에는 드물게 양당 모든 의원이 찬성을 표했었다.
물론 이는 특정 의원의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 상원 의회에서 반대의 뜻을 표하는 것으로, 해당 의원에게 실질적으로 미치는 결과는 없다. 상원에서의 보다 중요한 선택으로는 의원직을 정지시키는 동의안을 제출할 수도 있다.
자유당 의원들의 ‘비난 동의안’ 움직임과는 달리 호주의 군주제를 지지하는 그룹 ‘Australian Monarchist League’은 소프 의원의 행동에 더 큰 제재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그룹에는 자유당 의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동 그룹의 필립 벤웰(Philip Benwell) 의장은 소프 의원이 즉각 의원직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프 의원의 유치한 시위는 국가와 역사, 국민, 건전한 통치 시스템에 대해 수백만 명의 호주인이 갖고 있는 감사와 자부심을 약화시키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며 “사실 이는 수많은 국민들의 그런 감정을 더욱 강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국왕의 의회 연설에 참석했던 토니 애보트(Tony Abbott) 전 총리는 소프 의원의 행동에 당혹감을 표했다. 애보트 전 총리는 “불행한 정치적 과시주의”라며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소프 의원은 이날(월) 오후 내놓은 성명에서 다수 의원들의 비난을 일축하며 “의회 리셉션에서 쫓겨났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실 이 식민지는 훔친 땅, 훔친 부(wealth), 훔쳐낸 생명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면서 “왕실은 이 나라 원주민을 대상으로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 여기에는 전쟁 범죄, 반인륜 범죄, 집단 학살을 막지 못한 것이 포함된다. 이런 범죄에 대한 정의는 없다, 왕실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되풀이 했다.
전 노동당 상원의원이자 올림픽 대표 선수를 지낸 원주민 ‘기자’(Gija) 부족 출신 공화제 지지자(republican)인 노바 페리스(Nova Peris) 전 의원은 리디아 소프 의원의 행동을 비난하며 “이것(소프 의원의 발언)이 호주 원주민 전체를 반영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자신의 인스타그램(Instagram)을 통해 “의회에 진출한 최초의 원주민 여성으로서, 우리 국가와 왕실에 대한 무례한 소프 의원의 행동에 깊이 실망했다”고 게시했다.
페리스 전 의원은 이어 “상호 존중과 존엄성을 중시하는 모든 호주인을 대신해 찰스 3세 국왕과 카밀라 여왕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다. 2018년 찰스 왕이 ‘욜릉구 컨트리’(Yolngu Country)를 방문했을 때 그는 이 땅의 전통적 소유주들로부터 따뜻함과 존경으로 환영을 받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참여이다. 존경은 공평하게 주고 받는 것”이라며 소프 의원에게 일침을 가했다.
김지환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