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란 이름의 토마토
토마토 두 알이 플라스틱 랩에 싸여 냉장고 코너에 누워 있다. 꼭지에 연이은 초록색의 짧은 가지가 토마토에 그대로 붙어 있다. 이미 상품으로 변신한 토마토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이 낯설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경박한 수경 재배의 ‘원죄’를 면죄 받고, 무언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고객에게 ‘신선도’를 약속해주고 싶어하는 그런 안타까운 그러나 실현될 수 없는 토마토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토마토의 붉은 색과 립스틱 짙게 바른 여인의 모습이 순간 오버랩 된다. 내 손에 들어온 차가워진 토마토에 선뜻 정감이 가질 않는다. 고객의 눈길을 끌려고 의도했던 진한 붉은 색이 외려 나의 욕망 스위치를 꺼버린다. 정감이야 가든 안가든 토마토는 한낱 토마토일 뿐 오늘 아침 나에겐 유일한 아침 식사 재료이다.
토마토 두 개를 플라스틱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로 사등분 한 다음 가운데가 움푹 파인 접시에 가지런히 놓는다. 그 다음 전자레인지에 넣고 3분간 돌린다. 3분간 무차별 전자파 열 찜질을 당한 토마토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토마토는 성분의 90 퍼센트가 물이라고 한다. 곤죽이 된 토마토 밑으로 붉은 물이 흥건히 고인다. 납작한 스푼으로 아직 물과 합류하지 못한 토마토의 남은 살덩이를 으깨어 버린 다음, 그 위로 소금과 후추 가루를 뿌린다. 토마토 수프가 완성된다. 따끈하게 데워진 토마토 죽은 나의 목구멍을 따라 밤새 비워진 위장과 창자로 내려가 곧 내 몸의 일부가 될 것이다.
내 몸 또한 70 퍼센트는 물이 아닌가! 물은 토마토 안에 잠시 머물다 내 몸으로 이동한 다음 잠시 후 변기를 통해 하수도로 빠져나가 머지않아 시드니의 복잡한 하수 시스템을 통과한 후 가까운 비치로 달려갈 것이다. 영과 혼의 윤회야 내 알 바 아니지만 물은 두개의 수소와 하나의 산소가 공유결합하여 이루어진 화학 물질이다. 이 물이 여러 가지 형태로 잠시 세상에 출현했다가 사라져 버리는 수많은 생물과 무생물의 몸을 통과하면서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으니 그것이 윤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름다운 비치에서 한 금발의 호주 여인이 아이의 손을 잡고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방금 파도의 물에 씻겨진 모래사장은 마치 거울처럼 파란 하늘을 담고 있다. 그 위로는 작은 은둔자 게(Hermit crab)의 한 무리들이 바위 곳곳에 송곳으로 뚫어 놓은 것 같은 작은 구멍들을 찾아 잽싼 걸음으로 달려가 몸을 숨긴다.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이 게에게 위험한 포식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인은 비키니 차림이고 아이 역시 같은 브랜드의 작은 비키니를 입고 있다. 탄탄한 둔부를 바치고 있는 노란색의 나일론 천에는 LUST라고 검은 글씨가 박혀있다. 그것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누가 알랴? 아니면 사랑과 욕망이 뒤 섞인 긴박하고 혼란스런 순간이었는 지 모른다. 아무튼 아이는 용암처럼 분출되는 육체의 욕망의 힘에 이끌리어 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것이고, 이제는 엄마의 손을 잡고 모든 생명의 시원이었던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수평선 너머에 있을 새로운 결핍, 새로운 욕망을 찾아서.
여인과 아이가 바다 이 쪽의 건조하고 무미한 세상으로 사라지자, 이윽고 우뢰같은 소리를 내는 파도 사이로, 서핑 보드에 올라탄 구리 빛의 젊은 서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바다의 영주라도 된 것처럼, 파도와 해풍과 갈매기들을 아래 것으로 거느린 모습이다. 집채만한 거대한 파도는 이들을 삼켰다가 다시 뱉는다. 이들은 숙련되고 날렵한 동작으로 파도의 날카로운 발톱과 사나운 이빨을 피해 나간다. 시간은 잠시 얼어붙은 채 정지해 있고, 파도는 수십 킬로의 거대한 담장을 만들었다가 이내 허물어 버린다.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파도의 리듬 속으로 만물이 그 앞에서 복종하고, 만물이 그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파도의 신은 풀어헤친 수천 수만 가닥의 머리카락을 해풍에 날리면서 수평선 저 쪽으로 달아난다.
금년 호주 겨울은 비가 별로 내리지 않아 건조하다. 지난 주 아내가 침실의 습도를 조절한다고 가습기 한 대를 샀다. 침대 옆 작은 탁자위에 놓인 가습기는 마치 커다란 바가지를 엎어놓은 모습이다. 가습기 안에 물이 채워지고 스위치를 넣으면 마치 라면 물이 끓는 듯한 소리를 내며 하얀 증기를 뿜어낸다. 두 손으로 가습기를 만져본다. 완만한 곡선을 이룬 여인의 엉덩이를 만지는 기분이다. 가습기 속의 따스한 온기가 내 손을 통해 몸 안으로 전달된다. 순간 행복해진다.
가습기 물 온도는 인체처럼 36.5도이리라. 소리를 내고 인체와 동일한 온도를 하고 비록 플라스틱이지만 몸을 가졌으니 이 또한 생명체가 아닐까? 물은 지금 가습기에 담긴 채 하얀 수증기로 변신하면서 플라스틱 몸을 천천히 빠져나온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건넨다. 나를 나의 고향, 그것이 섬진강이든 아드리아 해이든 또는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이든 아니면 갈릴리 호수이든 내가 왔던 그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