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도 콩값
어린 시절 방에서 뒷문을 열면 크고 작은 장독들이 옹기종기 놓여있고, 눈이라도 내리는 겨울이면 털모자를 쓴 장독들이 하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커다란 간장독을 열고 들여다보면, 달큼하고 짭조롬한 간장 냄새와 깊고 까만 고요 속에 맑은 하늘이 가득했다.
고향 떠나 오래다 보니 태어난 땅에서 나이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축복인가 싶다. 본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고향을 떠나면 적응하는 데 시간 걸리는 것이 음식인 것 같다.
한국 식품점이나 한국 식당이 없는 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지만, 또 한편 자급자족하겠다는 마음을 끌어내기도 했다. 라면이나, 된장 등 한국식품을 사러 보츠와나, 가보로니에서 400 km가 넘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까지 다녔다. 처음 몇 년은 이렇게라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에서 먹던 엄마가 만든 장醬이 먹고 싶었다. 매콤한 고추장에 된장 상추쌈이 그리웠다.
한국인의 기본 반찬은 장醬 종류가 아닐까 한다.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더는 막장까지 부엌에 장 종류만 갖추어져 있어도 마음이 든든하다. 질그릇에 잘 익은 장을 떠 담을 때면 입안에 감칠맛이 돌기도 한다. 찾아보니 한국 전통요리책이 있었다. 김치, 메주, 고추장 만들기 등 평소 생각지 못했던 많은 요리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비록 내가 태어난 땅의 재료들은 아니지만 주어진 속에서 고향의 맛을 찾고 싶은 것이 나만의 치기였을까.
중국 가게가 있어서 메주콩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실패해도 콩값이다’ 하는 마음에 노란 메주콩을 5kg 샀다. 요리책을 떼어서 부엌에 붙여놓고 따라 했다. 모든 것은 한국 기준이었다. 당연히 실패했다. 5kg의 메주콩이 한 움큼의 메주가 되었다. 그것도 감히 메주라고 말할 수 없는 실패의 부스러기들, 하지만 버릴 수 없어서 소금물을 풀어 된장, 간장을 만들었다. 첫 작품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장 담기는 해마다 칠월에 메주를 만들고 있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로 몇 주일 해바라기를 하며 말린 메주가 속이 끈적거릴 즈음 하얀 곰팡이가 생기면서 메주 뜨는 냄새가 난다. 한국에서는 볏짚으로 매달아 겨우내 띄워 봄에 장을 담지만, 계절이 다른 시드니나 아프리카에서는 칠월에 메주를 쑨다. 장은 왜 말 날이나, 손 없는 날 담는지 모르겠다.
장담는 날은 설렌다. 풀어 놓은 소금물에 달걀을 띄워 큰 동전 크기만큼 떠오르면 적당히 염도가 맞는다. 요즘은 염도계로 측정하지만, 그 옛날 조상님들은 어떻게 달걀을 소금물에 띄워 볼 생각을 했을까? 지혜가 감탄스러울 뿐이다. 나도 이 방법으로 염도를 맞추고 있지만, 달걀을 소금물에 넣을 때마다 신기하다. 소금물 부은 항아리를 햇볕 좋은 곳에 두고 아침, 저녁 뚜껑을 여닫으며 문안 인사를 한다. 사, 오십일 후에 장 가르기를 한다. 메주를 꺼내 곱게 부셔서 항아리에 담아 웃 소금을 얹고 다시마로 덮어 발효시키면 된다. 메주를 건져낸 까만 소금물이 간장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지, 마트에 가면 종류도 다양한 간장 된장들이 길게 진열되어 있는데.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시중에서 파는 장 종류보다 엄마가 만든 장이 맛있다 하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사 먹는 된장은 단맛이 있어 음식 간 맞추기 쉽지 않다고 제법 장맛 아는 소리를 한다. 집에서 만든 간장으로 미역국을 끓이면 최고라고 하니 고맙기 그지없다. 이 맛에 해마다 메주를 쑤나 보다. 마치, 어린 나이에 고향 떠나 자란 우리 아이들 같은 메주를 보면 측은지심이 들기도 한다.
어느 날 지인 집을 방문했는데 부엌 창가에 똑같은 화분이 대여섯 개 놓여있었다. 뭐냐고 하니 검은 보자기를 들춰 보여준다. 노란 콩나물이 빼곡히 들어있다. 갑자기 “건방진 콩나물은 시루 안에서도 누워 있다.”라는 말이 생각나서 다시 들여다보니 웃음이 났다. 미나리, 파, 상추 등을 창가에 가지런히 화분을 놓고 키우는 지인의 모습이 평소와 달리 믿음직해 보였다. 마치 잘 발효된 된장처럼 인간미가 느껴졌다. 사실 마켓에서 사면 얼마나 하겠는가?
시간을 거슬러 사는 것 같아 진부하단 생각도 들지만, 둥그렇고 조그만 항아리에서 장을 뜰 때면 마음이 뿌듯하다.
K 문화가 세계로 향하는 요즈음, 우리 전통 K푸드에 관심을 가져봄 직하지 않을까. 보츠와나에 사는 동안 한국 식품에 대해서는 유효기간이 없었다. 라면이면 행복했고. 국수면 만족했다. 라면 봉지를 열면 찌든 냄새가 나고, 수프가 굳어 물에 풀어 넣어야 했지만 잘 먹었다. 귀한 라면이라 국수와 함께 삶아 양을 늘려 먹었다는 어떤 교민의 이야기를 듣고는 많이 울었던 기억도 있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파는 곳이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메주를 쑤고 장을 담는 일이 힘들고 긴 시간 기다림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한 번쯤 시도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느긋하게 뜸 드는 메주콩을 기다리는 마음은, 시간의 또 다른 긴장감으로 설레는 행복을 맛볼 수 있게 해 준다. 오며 가며 나를 보고 있는 항아리들을 보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장을 만들며 자연의 순리를 배우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전통음식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