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세요?
한 개인 자의식의 기초는 타인의 시선에 달려있다.
-프리드리히 헤겔(Friedrich Hegel)-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인간의 절대적 정체성이란 없다. 나는 나에 대한 기억이며, 나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판의 거울에 비친 반영이다.
호주에는 ‘범죄 계층’ 이론을 만들고 죄수들의 추방을 계획한 영국의 엘리트 계급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놀라운 역사가 숨겨져 있다. 18세기 중반부터 갑자기 불어닥친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대거 몰려든 농민들은, 기본적인 인권과 사회복지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절 대다수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 그 당시 사회상을 담은 한 신문 기사에는 “런던의 길거리 어디에나 버려진 고아들과 소매치기, 매춘부, 도둑들이 넘쳐나고 있다. 범죄자들을 계속 영국 밖으로 내보낸다면, 미래의 영국은 범죄가 없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선천적(기질적으로) 범죄를 쉽게 일으키는 사회 계층 (criminal class)’이 존재한다는 가설에서 비롯된다. 영국은 넘쳐나는 범죄자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788년부터 1868년까지 약 16만 명의 죄수를 호주로 이송했다. 이 가혹한 처벌은 영국의 범죄율을 줄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천적 범죄형 인간으로 정체성이 규정되었던 죄수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법을 준수하는 시민으로 변모했고, 결국 호주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 세상이 우리에게 들이미는 거울은 우리가 범죄자가 될 것인지, 착한 시민이 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는 인식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라고 느끼는 정체성은 내가 태어난 이후 성장하는 동안 내가 속한 사회의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애들레이드 대학 부설 암 연구센터에서 근무했을 때의 일이다. 조용한 실험실에서 30대의 동양 여성 연구원과 나 사이에는 묘한 동료애가 싹트기 시작했다. 서양인들로 가득한 건물에서 우리는 포크와 나이프 가득한 서랍 속 젓가락 두 개처럼 눈에 띄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자신 있게 한국인이라고 소개했다. 그녀의 얼굴에 비친 묘한 감정을 채 읽기도 전에 그 연구원은 “저는 한국 입양아예요. 태어나자마자 호주로 와서 한국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고 한국어도 못합니다. 미안해요…”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잘못을 빌고 용서를 받아야만 할 것 같은 중압감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시작된 첫 만남 이후 우리 사이에는 문화적 실수와 서로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가 몇 번 더 있었고, 나는 레베카(가명)를 한국인으로 대하는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유전적으로 우리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녀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정체성은 분명히 한국인이 아니었다. 이 사실은 한여름 땡볕 속에서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처럼 나를 이상하게 낙담시켰다. 그것은 인구 감소와 같은 사회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여전히 많은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는 불편한 진실과도 연관이 있었다.
어렸을 때 나는 야생에서 동물에 의해 키워진 인간 아이들의 이야기, 카말라와 아말라, ‘정글북’의 모글리, ‘로마 신화’의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매료된 적이 있다. 정글에 버려져 동물에 의해 키워진 아이가 적응하고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짐승처럼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무섭기도 하고 매혹적이기도 했다.
레베카의 존재는 나에게 ‘도대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 입양되어 자란 아이는 미국인이 되고, 덴마크에서 자란 아이는 덴마크인이 되고, 프랑스에서 자란 아이는 프랑스인이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유전적 경계를 초월한다. 정체성은 다양한 형태의 그릇에 담긴 물처럼 환경과 사회에 의해 형성되는 가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