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숨기려 할수록 인생에서 그것의 존재감이 커지는 것. 세월이 흘러도, 나라를 바꿔가며 돌아다녀 봐도 진드기처럼 찰싹 내 몸에 붙어있다.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기도 하지만 만인에게 알림으로써 비밀 스스로 미래에 다가올 시간과 함께 소멸하는 것을 택하기로 한다.
나에겐 고딩 시절부터 혼자 숨겨왔던 비밀이 하나 있다. 독일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단어의 강변화 약변화 1식, 2식에 관한 질문을 하곤 했다. 대답 못 하는 학생들을 분단별로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일어나서게 하고는 모세의 지팡이처럼 휘어진 대나무 뿌리로 머리를 내리쳤다.
매달 치르는 월말고사 성적은 앞으로 전진만 있고 전 달보다 점수가 떨어지면 떨어진 점수만큼 체벌이 따랐다. 겁 많은 나는 매 맞는 것이 정말 너무 싫었다. 그래서 앞에 앉은 녀석하고 거래를 했다. 내가 잘하는 화학 시험 답과 그 친구가 잘하는 독일어 시험 답을 서로 주고받기로.
우리는 시험 전 화장실에서 만나 “폭력에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맞서자”라며 불끈 쥔 주먹을 허공에 흔들어 댔고, 죄책감은 몽당연필만 하게 줄어들었다.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순전히 독일어와 화학 선생에게 맞는 것이 두려웠을 뿐. 근데 사달이 났다. 이 친구가 내게 답을 알려준 후 어떤 문제의 답이 확신이 안 들었는지 고치는 바람에 운 나쁘게도 내가 우리 반 최고점인 88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동안 독일어 수업 시간에 최적화된 나의 생존 전략은 존재감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며 선생님 눈에 최대한 띄지 않는 것이었다.
이후 독일어 선생님은 나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셨고 선생님의 그윽한 눈빛에서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우리 반 독일어 평균이 30~40점대였기 때문에 다음 달 시험에서 갑자기 40점을 받는다면, 떨어진 점수만큼의 체벌, 아니면 시험 부정행위에 대한 의심을 피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잠을 설쳤다. 결국은 다 내려놓고 하기 싫은 독일어를 그냥 열심히 하기로 맘을 먹었고, 그 이후 70점대 점수를 유지하며 졸업했다. 그런데, 인생은 알다 가도 모를 일이다. 호주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독일로 가게 된 것은 우연이었고, 독일어 언어 자격시험(PNDS) 준비하는데 학창 시절 악몽 같던 시간에 배운 독일어 문법이 도움이 될 줄이야! 박사학위를 하려면 전공 연구논문 외에 독일어 시험 점수가 70점을 넘어야 하는데 딱 70점을 받은 것이다.
시험 부정행위 (컨닝)가 나쁜 짓이라는 것을 내가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시험 문제가 도대체 뭘 물어보는 것인지도 몰라 당황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왼쪽 앞에 앉은 아이의 어깨 넘어 시험지를 들여다보았고, 선생님이 내 책상 오른쪽 옆에 계속 서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시간이 좀 지난 뒤였다. 이후 혹독한 시련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손바닥에 작은 글씨로 예상 답안 문장들의 첫 글자 쓰기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시험장에서 구사하는 컨닝 기술이 장인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 하버드 대학 관계자들이 한탄하는 것을 보면, 컨닝은 교육시스템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시험 부정행위로 학창시절 학교에서 퇴학당한 노벨상 수상자, 발명가, 과학자, 유명가수, 정치인, 종교지도자 등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한다. 시험 부정의 역사는 시험을 통한 성공에 대한 압박이 컸던 르네상스 시대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명의 기록에서도 보인다. 심지어 엄격한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 현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 교육부의 한 역사 자료는 “예상 답안지를 갖고 가거나, 대리시험 보기, 시험지 바꿔 치기, 채점자 매수, 시험장 밖에서 작성한 답지 들여보내기 등 과거 시험장은 난장판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컨닝의 방법도 변하고 있다. 호주에서는 해마다 한국의 수능시험에 해당하는 HSC 시험을 치른다. 그런데 2023년 기준, 지난 5년 동안 HSC 시험에서 부정행위 사례는 두 배로 증가했다. 학생들은 시험장에서 금지된 데이터 입력 가능한 시계, 스마트폰, 무선 헤드폰, 전자사전, MP3 재생기 등을 사용하거나, 고전적인 방법인 손바닥과 팔에 공식이나 예상 문제의 답을 미리 써놓기, 무릎에 노트 감추기, 시험 종료 후에도 계속 쓰기 등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교육전문가들이 앞으로 시험 부정행위 관련 가장 우려해야 할 것은 ChatGPT 시대의 도래라고 한다.
인공지능이 모든 분야에서 인간 전문가를 앞서는 터무니없는 세상에서, 그동안 마음 졸이며 수고했던 수많은 인간의 시험 부정행위는 과거의 낭만으로 기억될 수 있다.
2038년, 아이가 선생님께 묻는다 “선생님 컨닝이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