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연필을 깎다
오랜만에 찾은 문구점에서 38개의 연필 한 팩을 샀다. 여러 색상의 연필 가운데 파란색은 어릴 적 사용했던 것처럼 머리 부분에 지우개가 달려있다. 책상 옆 필통에 10개를 꽂았다. 손바닥 크기로 줄어든 몽당연필들 사이로 2배도 더 되는 새 연필들로 까만 꽃술을 품은 파란 꽃이 가득하다. 그 속에 내 마음에서 멀어진 샤프펜슬의 꼭지가 보인다. 책상 위, 어지러이 놓여있는 서류들 위로 종이를 깔고 새 연필들 사이에 숨은 듯 뭉툭해진 몽당연필들을 꺼내어 깎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연필 깎는 소리가 은근하게 울린다. 연필은 예쁘게 깎였다. 흡족하다. 어린 시절, 한때 우러러 보이던 그 남자가 깎아준 연필도 이런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하교 후 친구네 집으로 갔더니 과외선생님이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노트를 펴는 동안 그는 친구의 필통을 열어 심이 부러지고 닳은 연필들을 꺼내어 깎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아까운 시간을 빼앗은 불청객에게 심술이 났다. 하지만 어쩌랴, 옆에 얌전히 앉아 한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긴 머리가 이마를 반쯤 가린 그는 온 정성을 다해 조각을 하듯 연필을 깎았다. 일곱 개의 연필이 가지런히 제 모습을 되찾자 고개를 들더니 내 필통도 꺼내라고 했다. 오빠가 없는 내게, 나이든 남자와의 대화는 교생선생님 이후 처음이었다. 낯설어 하는 나를 보며 미소를 머금은 그는 내 가방에서 필통을 꺼냈다. 자석달린 필통 뚜껑을 열자 뭉툭하거나 심이 부러진 연필들이 놓여있었다. 그의 손놀림은 자연스러웠다. 내가 어설프게 깎은 연필들은 그의 손을 거치며 매끈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당시 육각형 연필과 함께 사각형 연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각 연필은 작업의 패였다. 연필의 지우개 밑 4개 면을 살짝 파내고 돌아가며 1, 3, 2, 4로 숫자를 적는다. 시험 볼 때 풀리지 않는 답은 연필 굴리며 처음 나오는 숫자로 4지 선다형 답을 찍었다. 그 연필을 들더니 내 머리를 콩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의 얄팍한 꾀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아는 대로 쓰렴. 자꾸 이렇게 연필을 굴려 요행을 삼으면 나중에 커서도 너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가지 못한단다.” 그의 말이 맞았다. 고등학교에서도 영어시험은 으레 몇 문제는 연필을 굴렸다. 그래도 정답 확률이 70%정도 였다.
그가 깎아 준 연필은 닳는 것이 아까워 쓰지 못했다. 언니가 가져갈 까봐 책상 서랍 속에 숨겨두고 하나만 필통에 가지고 다녔다. 가끔씩 외워지지 않는 부분을 그 연필로 썼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단어가 기억나고 앞 뒤 문맥이 떠오르는 기적의 연필이 되었다.
어느 날, 짝꿍 최영주가 필통을 던지는 바람에 마지막 연필이 부러졌다. 그 사건 이후 영주와의 관계도 끝났다. 그날부터 연필 깎는 연습을 시작했다. 아무리 깎아도 그렇게 매끈하게 되지 않아 속상해 하면서도 언니와 동생들 연필을 열심히 깎아 주었다.
연필깎이의 달인이 된 것은 6학년 졸업 때쯤이다. 친구들은 모두 내게 연필을 가져와 깎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존재는 곧 등장한 샤프펜슬로 지위를 잃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학생들의 노트를 점령한 것은 샤프펜슬이었다. 연필이 슬며시 자취는 감추는 사이, 샤프펜슬은 팬시상품으로 다양한 디자인의 제품이 나왔고, 그 펜슬의 변신과 함께 우리도 세상의 변화에 맞춰져 갔다.
연필은 또 다른 기억으로 나를 가슴 저리게 한다. 엄마의 다리는 유난히 예뻤다. 하지만 길쭉하고 하얀 장딴지 아래쪽에 흉터처럼 살짝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끝 부분이 파란 색인 이 흉터는 어릴 적, 막내 외삼촌이 엄마의 다리를 연필로 찍어 연필심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새벽일을 마친 다음 학교에 가려는 누나에게 8살이나 어린 동생이 심술을 부렸단다.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된 우리 형제들은 외삼촌을 미워했다. 여동생은 의사가 되자 엄마의 연필심 제거를 위해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하지만 오래된 연필심이 혈관 옆에 꽂혀 수술을 하더라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결국은 포기했다. 우리들은 또다시 외가집을 원망하고 엄마는 슬픔을 숨겼다. 당시, 초보 의사였던 동생에게는 미세수술을 할 정도의 능력이 없었다. 그 이후 엄마의 건강이 점점 나빠져 엄마의 예쁜 다리에 하나의 흠으로 남아있던 연필심 제거 기회도 멀어졌다. 엄마의 삶에서 중요한 일들은 늘,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엄마의 고향인 경상남도 창원 인근, 가음정이라는 곳은 낙후된 시골 마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종가 큰 어른으로 자식 9남매와 친인척을 아우르며 크게 농사를 짓고 살았다. 남존여비 의식이 지배적이던 1940년대, 그래서인지 형제들 중 여덟 째인 엄마에게 일어난 연필심 소동은 곧 잊혀졌다. 형제 많은 집안, 그것도 딸이었던 엄마는 초등학교도 2년을 늦춰 들어갔고, 그 억울함에 지독하게 공부하여 초등학교를 월반하면서 같은 나이의 친구들과 동시에 졸업을 할 수 있었다. 통영중학교를 마치고 진주여고를 다니는 동안, 집안에서는 “여자가 무슨 공부냐”라며 구박이 심했단다. 주말마다 집으로 가 숨가쁘게 밀린 집안일을 하고 월요일 새벽, 첫차를 타고 진주로 등교하며 힘들게 진주여고를 졸업했다. ‘쓸데없이 여자를 공부시킨다’는 당시의 세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엄마의 다리에 깊이 박힌 연필심은 엄마가 헤쳐 나가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는 듯 했다. 살아생전, 엄마는 가끔씩 연필심이 박힌 종아리를 쓰다듬으면 “나 만큼 연필을 오래 잡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며 씁쓸하게 미소 짓곤 했다.
연필을 깎는 동안 나무향이 사무실을 감돌고, 깎아 둔 연필들 밑으로 흑연가루가 소복하다. 마음이 혼란해지면 연필을 깎는다. 사각사각 깎이는 나무들이 생각의 때를 없애주는 듯, 연필을 다 깎고 연필심을 다듬는 동안 차분한 정신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 세상과 타협했던 샤프세대가 다시 연필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렇게, 우리네 삶은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