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발코니에 서시다
어머님의 나이는 올해 92세이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마트에 가시는 일과 병원에 가셔서 약을 타신다거나 두 달에 한번 황반변상 때문에 시력검사를 하시는 일 외에는 거의 외출이 없는 어머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아파트에서 보내신다. 90이 넘은 노구로 독거하시면서 독립된 생활을 하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시지만 몇 년 전부터 급격히 왼쪽 귀의 청력이 떨어지면서 외출을 한다는 것은 거의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황반변성으로 눈 한쪽의 망막에는 세상의 상이 잡히지 않게 되었고 게다가 한쪽 귀의 청력 감퇴는 방향감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외출하실 때 주로 택시를 이용하시기는 하지만, 건물의 계단이나 길에서 넘어지시기라도 한다면 어떤 위급한 상황이 닥치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로서는 최선의 방책이 가능하면 외출을 줄이고 집에 칩거하는 것이었다.
그 날이 망종이었거나 현충일 전날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부터인지 어머니는 발코니에 서서 우두커니 바깥세상을 바라보시기 시작했다. 유리창 몇 개가 달린 발코니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세상이래야 기껏 아파트 건너편 건축 부지로 지정된 공터와 멀리 미세먼지에 잠긴 채 희미하게 그 산세의 윤곽을 들어내고 있는 삼악산, 그리고 오른쪽에서 아파트와 상가 건물 사이로 보이는 소양호의 일부가 전부였다. 한동안 그 곳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님의 표정이 달라지셨다. 그 공터에서 그 동안 지연되었던 아파트 신축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정물화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는 풍경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동적인 변화뿐만이 아니다. 갑자기 나타난 각종 건설 장비들은 적지 않은 소음을 길 건너 아파트까지 배달해주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덩달아 바빠지셨다. 물론 바빠진 것은 어머님의 동선이 아니라 마음이기는 했지만. 어머님은 매일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관찰하셨다. 오늘은 어떤 장비가 투입되어 땅을 얼마나 파냈는지 또 어떤 날은 장비가 종일 놀고 있었는지 등등 공사 진행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내게 설명하실 정도였다. 마치 현장에서 공사를 감독하는 일과 비슷했다. 아파트 기초공사가 끝나고 아파트 건물의 골조가 세워지기 시작할 즈음, 어머니는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건축 장비 이름과 용도까지 파악하셨다. 크레인에 장착되어 땅에 파일을 막는 거대한 해머기, 바위를 깨고 땅에 구멍을 파는 굴착기와 불도저, 굴삭기, 포크레인 등등 이름 모를 괴물같이 생긴 장비들이 현장을 들락날락 거리면 돌을 깨고 땅을 파고 판 흙을 덤프트럭에 실어 옮기는 일을 종일 바라보시면서 하루 시간을 보내시는 모습이 전혀 지루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내심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의 내면에서 토목기사의 잠재성이 뒤늦게 눈을 뜨는 것이 아닌가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오래 전에 작고하신 어머님의 남동생 즉 나에겐 외삼촌이 건축공학을 전공했다는 것으로 미뤄 볼 때 어머님의 피 안에는 그러한 ‘건축’과 ‘엔지니어링’에 대한 갈망과 욕구가 잠재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구십을 넘은 어머님 안에 그런 때 늦은 열정이 피어난다면 그것은 피우지 못한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속에 한 번도 피워보지 못한 시인, 화가, 가수, 발명가, 과학자, 의사, 탐험가들의 몸을 매장하고 있을까? 그것은 마치 산부인과 수술실에서 한 번도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곳으로 사라진 아이들하고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세상의 빛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빛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 산자들이 그 아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예의이며 자비일 것이다.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불과 6개월 정도가 지났는데 아무것도 없던 빈 공간에 38층의 고층 아파트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건물에 창틀과 문들이 달리고 유리와 페인트로 옷이 입혀지고 급조된 나즈막한 언덕에는 철쭉과 벗꽃나무 그리고 팥배나무가 이식되었다. 아마도 몇 년 후에는 시베리아에서 붉은 머리에 금줄이 지나간 이름 모를 철새들이 날아오고 직바구리가 옥상 위 허공에서 자맥질하며 가슴의 보드란 털을 뽑아 그 때는 제법 실해져 있을 나뭇가지 위에 작고 예쁜 둥지를 지을지도 모른다. 불과 2, 3년 전만해도 6, 70년대에 지어진 낡은 함석지붕을 가난의 상징물처럼 쓰고 있는, 이미 오래 전에 주인이 떠난 옛집들은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최신 건축공법과 고퀄리티의 건축 자재를 사용한 멋진 아파트가 들어서서 젊은 새 커플들을 주인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어머님은 한 동안 공사장으로부터 건너오는 소음 말고도 다른 소리를 듣기 시작했는데 어머님의 진술에 의하면, 낮에는 가까운 산으로부터 산비둘기 울음이, 밤에는 희미해지는 먼 산으로부터 올빼미인지 소쩍새인지의 울음이 이 곳까지 날아와서, 어머니의 왼쪽 귀 끝에도 걸리곤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어머니를 조만간 이비인후과로 모시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더 우려되는 일은 어머니의 관심사가 과연 새로 올라가고 있는 신축 아파트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왼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한국에 방문한 기간 중에 시간을 내어 어머님에게 보청기를 해드린 것이 불과 몇 주 전이었다. 하루 종일 보청기를 착용하시는 것이 아니었고 특별히 외출하실 때나 손자들이 방문했을 때 보청기를 사용하셨다. 보청기를 안 하실 때 아마도 이명 같은 현상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비둘기 울음, 소쩍새 울음을 저녁 어스름 할 때 또는 한밤중에 들으신다는 것은 좀 뭐뭐하지 않은가?
그 산비둘기 소리를 듣기 시작한 뒤에도 어머님은 베란다에 선채로 길 건너 아파트 공사를 감독하셨다. 이제는 아파트의 외장 공사만 하면 거의 완공한 것이나 다름없는 단계에 있어서 특별하게 볼 만한 광경도 없었지만 어머니는 베란다에 서서 여전히 무언가를 찾으시면 서 계시고 있었다. 그 곳에는 아파트 기초공사를 하면서 땅 속에서 퍼 올려진 채 조경공사를 위해 사용하려고 공사장 한 구석에 커다랗게 쌓아 올려진 붉은 흙더미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가 발코니에 바라보신 것은 공사현장이 아니라 땅 속으로부터 퍼올려지는 엄청난 양의 붉은 흙더미였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어머님의 흙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바람은 바람이 부는 곳으로 달려가고, 물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치닫으며, 불은 불을 사모하고 흙은 흙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자연의 순리 아닌가? 한국방문을 마치고 호주에 온 지 거의 6개월이 지나간다. 지금쯤 새로 완공된 아파트에는 새 주인들이 입주했을 거다. 그곳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어머님 아파트 쪽을 바라보면 봉의산 자락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보면 지난 번 홍수로 표토가 벗겨진 채 붉은 황토가 그대로 노출된 곳도 보이겠지. 필경 지금 쯤 그 아파트 베란다에는 마치 무덤의 봉토처럼 생긴 그 흙더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노인 한 분이 있을 것이다. 삶은 서로 바라보면서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