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뉴기니에서의 시간
화장실이 없는 곳을 다녀온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요즘 들어, 기억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 다시 한 번 가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숙제가 간절해지곤 한다.
화장실은 적어도 하루에 대여섯 번은 가야 정상적인 신체 생물활동으로 진단되는 곳이기에 병원에 가면 반드시 묻는 질문이다. 그러기에 화장실은 생명 유지에 아주 중요한 장소다. 요즈음에야 화장실이 집안에 있지만 예전에는 뒷간이라 부르며 아예 없는 듯 눈에 띄지 않게 후미진 곳에 두었다. 그래도 화장실은 있었다. 하지만 그 소중한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 이는 10년이 지났건만 내게는 풀기 힘든 숙제와도 같이 가슴 속에 큰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다.
요즘같이 비가 많은 시드니에서는 가끔 그들의 야릇한 공기가 느껴진다. 겨우 50년 전의 한국, 서울에서도 공중화장실을 쓰는 달동네가 엄연히 존재했다. 우리는 그 시절을 잊고 있었다.
2013년 이맘 때, 시드니 한인성당 젊은이들이 시간을 내어 다녀온 세상의 사각지대 가운데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몽골, 네팔, 캄보디아의 외딴 지역의 사람들, 그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마트폰에 담아 온 사진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밀림 속 좁은 길을 올라가는 젊은이들의 모습 한쪽에 50여 년 전의 한국의 시골과도 같은 풍경이 있었다. 얼마 전, 네팔의 오지를 다녀왔다는 그들은 다시 시간을 내어 파푸아뉴기니를 가고자 한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세상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작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청년들에 이끌려 한 번쯤 동참하고 싶었다.
반년가량의 준비 시간을 갖고 파푸아뉴기니로 갔다. 그곳 어딘가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그 원시와도 같았던 곳에서의 시간이 오래도록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될 줄은 몰랐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한국의 수녀님들이 직접 설립하여 20여 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여자중고등학교였다. 방문 전 보게 된 사진에는 아주 잘 가꾼 학교 전경과 교복을 입은 평범한 소녀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 사진 속 모습으로 인해 현지 방문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큰 부담을 갖지 않았다.
다섯 시간의 비행 후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도착한 그곳의 현실은 사진을 통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급에는 세 명의 임산부 학생이 있었다. 흑진주 같은 피부에 긴 속눈썹의 그녀들은 임신한 탓에 교복을 입을 수 없었고, 아무렇게나 입을 수 있는 간편한 트레이닝 복장으로 책상에 앉아 수학문제를 풀고 있었다. 참관 수업 내내 시선은 그녀들을 향했고, 이런 내 모습을 본 담임교사는 수업이 끝난 후 그녀들의 앞날을 걱정했다. 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갔다가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는 학생들. 그녀들은 고등교육을 받았기에 몸값이 올라 돼지 5마리 이상으로 팔려갈 수 있다고 한다. 가톨릭재단 운영으로 학비가 저렴한 이 학교는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위해 설립되었다. 하지만 고등교육기관이 부족한 PNG에서 이 학교 학생들이 가족의 ‘값나가는’ 재산목록이 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돈 많은 부자들은 여러 명의 여자와 중복 결혼이 가능한 이 지역에서 어린 여자 학생의 교육은 그저 그들의 악세서리에 불과한 셈이다. 학비와 기숙사비만 있어도 집으로 보내지 않을 수 있다는 수녀님, 담임교사들의 한숨 섞인 한탄은 이 현실에 답이 없다는 의미였다.
PNG를 다녀온 후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레지오 활동으로 양로원 방문을 하게 되었다. 안면이 있는 어르신이 그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교통사고 이후 거동이 어렵게 되자 집에서 있을 수 없어 임시로 와 있다는 그는, 찾아오지 않는 자녀들을 원망하며 매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남2녀의 자녀는 모두 나름대로 명망이 있다고 하지만 힘없고 나이든 어머니보다 자기 자식들 뒷바라지가 더 중요했다.
어르신은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는 도중에 암이 발견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그분을 보며, PNG의 여학생 얘기를 했다. 그런 삶도 있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어르신은 화난 얼굴로 휙 돌아누웠다. 자신을 내버려 두라는 차가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어르신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밝은 목소리로 한 번 와 달라는 말에 퇴근 후 부랴부랴 양로원을 찾았다. 암이란 진단이 오진이었나 하는 생각으로 그녀를 찾았더니 수액을 맞는 중이었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에 따라 침대 옆으로 가자 그녀는 PNG의 학생들을 위한 모금에 동참하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내 이야기를 들은 후 마음이 바뀐 듯했다. 이후 어르신은 PNG의 학생들과 연결이 됐고, 숨을 거두기 전까지 편지가 이어졌으며, 사망 후에는 제법 큰 금액이 PNG의 학교에 전달됐다.
PNG에서의 짧은 시간, 예상치 못하게 그곳 학생들과 연결하게 된 어르신의 죽음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PNG를 떠나면서 가졌던 마음의 무게는 여전히 내 어깨 위에 남아 있다. 나에게 색다른 시간을 갖게 해 주었던 성당의 청년들은 지금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가곤 한다. 남들이 어떻게 바라보든,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행동으로 펼치면서 누군가에게 진정 따스한 손이 되어주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떠했던가. ‘내게 아름다운 삶을 준 그대들에게 감사했어요.’ 누구에게 전하고자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양로원의 어르신 침대 옆 메모지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털어내지 못한 마음의 짐은 PNG 소녀들의 참담한 현실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못난 삶 때문이었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