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평소에 읽히지 않는 책을 골라서 작은 배낭을 꾸린다. 내 지적 수준에는 어렵다거나 표현이 막연해서 미루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름 읽기의 편식을 막으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일거리가 지천인 집안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이날 하루는 온전히 나를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잡다한 일상거리는 문 안에 구겨놓고 홀가분하게 기차를 탄다. 위급 상황이 아니면 연락두절하고 향하는 곳은 시티에 있는 국립도서관이다. 집중이 잘되는 날에는 간단한 점심 외엔 종일 파묻혀 있고 싫증이 날 땐 반나절도 안 되어 그곳을 나온다. 계획도 목적지도 없지만 짤막한 다리가 향하는 곳으로 그저 몸을 맡긴다. 별 생각 없이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다 보면 낯선 골목에 숨어있는 작고 예쁜 상점들을 만난다. 수공예품도 하나 둘 건지고 귀가 길 끝자락에 마시는 맥주는 내게 주는 조그만 사치이자 선물이다.
대개 빌딩 숲 안쪽으로 자리 잡은 바(bar)들은 유럽풍의 돌출된 아담한 간판을 걸고 있다. 이런 곳들은 거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분위기, 서비스, 음식 맛도 만족스럽다. 여느 때처럼 바텐더 카운터를 찾아 앉았다. 혼자서 가볍게 마시는 터라 굳이 테이블은 필요 없다. 주문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 후 천천히 주위를 살핀다. 부드러운 조명아래 한 무리의 백인 남자들이 낮은 톤과 웃음으로 저마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멀지 않은 거리이니 눈이 마주치면 당연히 자연스런 미소도 나눈다. 금요일 퇴근 후 가벼운 정장 차림으로 늦은 오후를 즐기는, 멋지게 나이든 은퇴 전의 중년들이 그날따라 별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대부분 사회의 주류로 지냈을 터, 살짝 덮인 흰 머리카락이 눈가의 주름과 여유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로맨스그레이라 했던가, 잘 물든 가을 나무들 같았다. 나이 먹은 남자들이 그처럼 세련되고 넉넉해 보일 줄은 몰랐다. 심장의 떨림까지는 아니었어도 술 맛이 달기 시작하며 눈에 콩깍지가 추가됐다. 해리슨 포드, 멜 깁슨, 리차드 기어… 급의 남자들이 지긋한 눈으로 내게 추파를 던지는 듯 했다. 묘하게 기분 좋은 느낌이 들며 그 상황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충고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인생 뭐 있는가? 횡재한 순간은 그대로 족했다. 온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말초 신경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나도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라고 은근히 실소했다. 감미로움과 흐뭇한 취기에 그들이 마시는 것과 똑같은 수제 맥주와 해산물 요리도 한 접시 추가하며 마냥 행복했다. 상황극 속에서 나는 졸지에 혼자 여행하는 어느 아시안 여자였다.
눈가가 처지고 하품이 시작되면서 아픈 남편과 십대의 두 딸들이 기다리는 현실로 돌아왔다. 로맨틱한 공간과 시간을 남겨두고 작별해야 했다. 계산서를 기다리며 귀가를 알릴 전화기를 찾다가 지갑과 함께 없어졌음을 알았다. 환상과 마법 사이에서 풀린 듯 초라한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편네의 술값을 치르러 시내 어느 바(bar)를 들어서던 남편의 얼굴이 조명 탓인지 누렇게 떠 보였다. 민망함과 황당함의 범벅… 그 후론 필름이 끊겼다. 평소 술 담배를 하지 않는 남편이 해장 북어국을 끓여 나를 깨웠다. 여느 때처럼 조용하길래 굳이 변명하지 않고 간간히 눈치만 살피며 쓰린 속을 달랬다. 아무 일 없었던 듯 그저 직장을 하루 쉬었을 뿐이다. 가장의 역할을 짊어진 내 삶이 버겁게 느껴져 일상들은 말라서 푸석해진 꽃 같았다. 쉬는 날엔 가끔 짐을 벗어나 책 읽고 맥주 한두 잔 하고 귀가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십 여 년 전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 물 좋던 바(bar)를 남편과 다시 찾았다. 그곳은 아담한 화랑으로 변해 있었고 부질없던 내 헐리웃 스타들도 흔적이 없었다. 가까운 와인 바로 자리를 옮겼다. 노란 피부의 왜소한 남자가 대신 내 술 잔을 채우며 마주 앉아 있다. 35년 전 동숭동 대학로에서 처음 만난 날도 말없이 마주앙을 따라 주었다. 유도 선수 출신이던 건장한 젊은이가 초로의 모습으로 그들과 오버랩 되며 애잔하게 다가온다. 감상의 주머니가 열리면서 겉모습 외엔 참으로 한결 같은 그의 성품을 다시 발견한다. 감정의 표출이 적고, 건강할 땐 열심히 일했고 손재주가 좋아 바느질과 요리도 그의 몫에다 부지런해서 집안은 늘 정돈 되어 있었다. 제일 고마운 건 그와 반대 성향인 나의 크고 작은 실수들을 지적 않고 기다려 준거다. 가끔 물 좋은 곳을 찾아 스트레스를 풀고 오라는 그의 너그러움은 자랑질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언제 이별할지는 모르지만 서로가 최소한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고 그것이 매 순간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그와 함께 많은 시간을 공유한 것, 순둥이가 내 남편이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번듯한 외모에 능력 있는 남자가 내겐 언감생심이지만 나 또한 그들과 내 남편을 절대 바꾸진 않겠다. 그럼에도 분위기 좋고 건강한 남자를 보면 입꼬리가 근질거리는 끼를 굳이 부정하며 스스로를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환상 속 나만의 헐리웃 스타들을 만나는 보너스, 내 기꺼이 즐기리라.
곽숙경 /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