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장화
이번 고국 방문 길에 감천에서 해안선을 따라 고개를 돌아가면 나오는 장림에 꼭 가보고 싶다. 내가 장림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감천 외삼촌 집으로 가는 버스 종점이 장림이라는 표지판 때문이었다.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내게는 생소한 먼 동네였다. 언젠가 종점까지 가 봐야지 하면서 잊고 지냈다. 강산이 변하고 내 기억도 퇴색되어 갈 즈음에 그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거기에 사는 한 남자를 만나고부터이다. 자주색 스웨이드 재킷을 걸친, 서울말을 쓰는 그는 세련된 도시 남자 같아 외곽에 있는 그 동네가 부산의 신흥 휴양지인가 싶었다.
해방 후에 일본에서 돌아온 그 남자의 아버지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정미소를 했다. 그는 폭우로 농지를 잃은 농민들에게 인근 산을 깎아 땅콩 농사가 잘되는 기름진 땅을 선사한 적이 있었다. 육십 년대 말, 그 남자의 아버지가 들어간 장림은 낙동강 하구를 낀 습지였다. 아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곳, 비가 오면 속수무책으로 먼 바다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후미진 어촌이었다. 미약하게 불기 시작한 개발 바람은 부산 끝자락, 소나무 숲만 길게 늘어선 그곳까지는 닿지 않았다. 하늘만 쳐다보아야 하는 주민들은 대답 없는 정부 기관보다 대나무를 꽂은 점집을 찾았다. 몇 집 건너 들어선 점집은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나른한 환상이 난무하듯 색색으로 된 깃발을 펄럭였다.
‘검은 장화’라 불린 그는 뿌연 밀물이 들어오면 갈대가 부딪쳐서 서걱거리는 그 곳의 지도를 바꿔 나갔다. 지금이야 화려한 첨단 장비로 여의도만큼 큰 땅덩어리라도 짧은 기간에 뚝딱 만들지만 그 당시 간척이란 외롭고 긴 전쟁터 같았다. 어업이 주민의 생업인지라 어촌계가 간척 후 생길지도 모를 손해를 들먹이며 들고 일어났다. 지역 토주들은 애물단지라 내버려 둔 습지가 순식간에 모네의 정원으로 둔갑하여 황홀한 꽃을 피우기라고 하는 듯 보상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검은 장화로 통한 그는 날씨에 매달려서 손 놓고 지내는 일 없는, 모두가 잘사는 마을을 주민에게 선물하겠다는 꿈 하나 붙들고 밀고 나갔다. 응원하는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곳에서 그 낯섦에 기대어 터를 다지고 길을 내었다. 토착민들은 가난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내가 결혼하여 들어간 장림은 잘 계획된 공장 단지였다. 일거리를 찾아 밀려든 이주자들로 활기찼다. 검은 장화라 불렸던 시아버지는 생전에 부의 상징이기도 했던 자가용은 물론이고 번듯한 옷 한 벌 없이 지냈다. 고향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내놓고 어려운 사람이 내미는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전생에 못다 갚은 빚이 많은 사람이기라도 한 듯 그의 주위에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아버지는 말없이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신음을 자신의 아픔인 양 품어 주었다. 나는 시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달디단 열매만 만끽하고 싶었다. 장맛비처럼 끊이지 않고 드나드는 객식구들 거두기가 벅찼었다.
서울 올림픽 축제의 열기가 시들할 즈음, 사촌 시동생은 컨테이너에 리복 신발 반, 꿈 반을 싣고 비즈니스 겸 공부를 하러 호주로 떠났다. 그가 전해온 호주 소식은 오즈의 마법사가 부리는 매직 같아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떠나고 싶었다. 아이들이 자라자 전염병처럼 퍼지는 영어교육 바람은 잠자고 있던 갈망을 흔들어 놓았다.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우리 가족을 시동생이 있는 호주로, 강한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아파트에 딸린 테니스 코트, 실외 수영장은 아이들의 교실이 되고 언어 습득의 학원이 되었다. 홍콩에서 온 학부형과 한국 엄마들은 재능 교육과 코칭 스쿨에 유별난 관심을 쏟았다. 나는 호주 엄마들처럼 먼발치에서 느긋하게 지켜보려 애썼다. 집 밖에는 햇볕이 따사로운데, 집 안에 있으면 부드러운 털이 달린 어그 부츠를 신어도 해가 갈수록 시드니의 겨울은 시리게 느껴진다. 몇 번이고 돌아가려고 짐을 꾸렸다가 아이들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하얀 목련이 나비처럼 하늘거리는 거리에서 양털 신발을 신고도 내디딜 곳을 몰라 서성거린다. 시아버지는 용이 못된 이무기가 앙갚음하듯 발을 끌어당기는 갯벌에서 희망의 신화를 그렸는데, 나는 사이사이 파란 잔디가 깔린 매끄럽게 포장된 길 위에서 아직도 길을 찾는다.
안전띠를 매라는 승무원의 낭랑한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나 창밖을 내려다본다. 고국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어머니처럼 정답게 반기는 낙동강이 굽이쳐 돌아간다. 빌딩 숲 어딘가에 오색 깃발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고, 검은 장화를 신은 시아버지가 불도저를 몰았던 옛날 장림이 있을 것이다.
사회 첫발을 내딛는 아들에게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품었던 할아버지의 열정이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송조안 / 호주문학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