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수저 부딪히는 소리만이 상위를 오가던 늦은 점심식사가 끝나갈 무렵 ‘어떤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뜬금 없는 남편의 말에 마지막 밥 숫가락을 입에 넣다 말고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었다. 처음 듣고 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낮설은 농담을 듣는 순간 당혹스러움도 웃음으로 튀어 나왔으리라. 농담이 절대 아니라며 그 여자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남편의 표정이라니. 젊어서 하기 힘든 생경스럽고 미묘한 이야기도 눈치 안보고 편하게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이 긴 세월 버티며 함께 살아온 노부부만의 특권일런지. 나는 싱거운 결말이 예상되었지만 오랜만에 대화나 이어보자는 심정으로 그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신바람이 나서 그 여자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앞에 아내는 없고 오랜 술친구 한 명 앉혀 놓고 말하듯…
태국이나 월남 출신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키의 중년 여성인데 챙이 둥근 흰색 모자를 쓰고 털이 길게 늘어져 출렁이는 큰 개를 데리고 우리 집 앞길을 산책하거든. 그는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듯 숨을 한번 크게 쉬며 더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지나가다가 나무 뒤에 서서 앞뜰에서 일하는 자기를 한참 바라보다가 가곤 하는데 이건 분명히 자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겠냐며 벌써 서너 달 됐다고 강조한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개가 나무에 구역표시 하느라고 잠시 있었겠지, 당신 증세가 요즘 젊은 애들이 말하는 도끼병 같다며 비아냥거리자 못 믿겠으면 한번 확인 해보라며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호주 이민 온 해부터 지금까지 이 집에만 살아 온 이십오 년, 그 긴 세월 틈만 나면 뜰에 나가 살다시피 하던 남편은 동네 소식통이었다. 누구는 집 팔고 양로원 가고 앞집 쌍둥이네는 이혼하며 집 팔고 누구는 혼자 산책 하길래 안부를 물으니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더라 등등. 지금은 옆집 삐에르네와 우리가 원주민이 됐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요즈음 근처에 개 공원이 생기며 개와 함께 걷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짧은 인사를 나누거나 아는 사람을 못 찾은 썬그라스 속 남편의 눈동자는 습관처럼 길을 향하다가 그녀를 보았으리라.
어느 날 오후 밥상을 차려 놓고 언제나처럼 앞 뒤뜰을 오가는 그를 찾아 궁시렁거리며 창밖을 보다가 나무 뒤에 서있는 그 여자를 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잔디에 앉아 잡초를 뽑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창문 뒤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하며 여러 가지 생각에 빠졌다.
혹시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마른편인 남편의 모습이 고국에서 농사 짖던 그녀의 아버지를 닮아서 그리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오래 전 헤어진 애인의 늙은 모습을 헤아리고 있을까. 그 후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남편이 그 여자 이야기를 꺼내자 또래의 남자들이 그 나이에 그런 일이 있다니 부럽다며 한번 만나보라고 맞장구를 치는데 힘 빠진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 그녀가 나무 뒤로 숨지도 않고 가까운 거리에서 평소보다 긴 시간을 한숨을 쉬며 바라보는데 자기는 당황스러워 못 본 척 돌아앉았고 그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나는 내 짐작대로 가족이 너무 그리워서 자기 나라로 돌아갔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쾌재를 부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만약 나한테 그런 일이 생겨서 어떤 남자가 꽃다발까지 들고 온다 해도 미친 남자로 생각할 텐데 어떻게 저 사람은 저 나이에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지 놀랍다고. 그러자 여자들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하는데 한 남자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소리쳤다. ‘그건 수컷의 본질이에요.’ 젊으나 늙으나 똑같다며 자기도 환갑 넘긴지 오래됐지만 지금도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예쁜 여자를 쳐다보다가 출발을 늦게 해서 욕먹고 있다는 말에 모두가 한바탕 웃고 끝났다. 뒤뜰 하늘의 반을 가릴 만큼 자란 자카란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쏟아지는 날, 내가 실눈을 뜨고 바라보며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좋아라 하면, 어느새 그는 전장에 나가는 장군의 투구처럼 모자를 눌러쓰고 갈고리와 쓰레받기를 양손에 들고는 채 마르지도 않은 꽃잎을 긁어모은다. 초록 잔디 위에 눈처럼 소복이 쌓인 꽃잎이나 낙엽을 보기 위해선 그것들을 쓰레기로만 생각하는 그와 싸워야 하니 포기하고 달 밝은 밤을 기다릴 수밖에.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는 몇 십 년 함께 살아도 같은 지구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함께 자고 같은 것 먹고 같은 것을 바라보고 살아도 생각이나 느낌은 사뭇 다르니 정녕 우리는 외계인인 채로 끝나려나!
이영덕 / 수필가, 시드니 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