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시간을 자동차로 달려서 하룻밤 머물 모텔에 도착했다. ‘Tall Timbers’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높다랗게 키가 큰 나무들인지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우람한 나무들인지 생각하다가 문득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의 주인공 이름이 ‘작은 나무’였던 것이 떠올랐다. ‘작은 나무’라 불리는 인디안 소년이 조부모와 산에서 살면서 자연이 품은 뜻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약한 가지들은 눈과 얼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참히 부러지고 강한 가지들만이 겨울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라든지, 사람들은 죽으면 정령으로 자연 속에 함께 머물러서, 만났던 사람들은 불어오는 바람처럼 그들을 느끼고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의 연결 고리와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은 작은 나무를 사람들은 큰 나무라고 부르는 것일 게다.
‘큰 나무들’ 모텔 방 앞에 있는 거울처럼 맑은 연못에 투영된 숲 그림자가 미풍에 가볍게 흔들린다. 밤새 유리창이 깨질 듯이 덜커덩거리며 무섭게 바람이 불더니 아침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해졌다. 바람이 거센 순간에는 잠잠해 질 수 있다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한참 힘들 때에는 그 어려움이 지나간다고 믿기 어려운데 밤은 이렇게 아침과 연결되어 바뀌고 있다. 시간이 정지된 듯 잔잔한 수면 위에는 햇살이 머물고 반사된 숲의 모습은 곁에 있는 실제 숲보다 더욱 선명하다. 물고기들이 만드는 작은 동그라미 파문과 오리가 끌고 가는 물결이 수면 위에 무늬를 놓는다. 연못에 비추인 나무들은 미풍에 잠시 일렁일 뿐 깊이 뿌리를 내린 듯이 꿈쩍도 하지 않고, 연못은 바닥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빨려들어가며 눈을 뗄 수가 없다. 깊이 더 깊이 들여다보는데, 잠시 내 얼굴이 수면에 머물다가 몇 발자국 물러서면 사라진다. 주변에 머물고 있는 모든 사물들이 연못에서 본래의 모습대로 어우러져 또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지나온 자취로서 비추어진 우리의 삶도 어쩌면 저 연못에 담겨 있는 모습처럼 실제 살아온 삶보다 더 또렷하고 명료하게 남아 있는 게 아닐까? 그 당시에는 사느라 바빠서 간과했던 점들도 이제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듯이 내 마음 속 시간의 흔적들이 조용한 순간에 모여 있는 느낌이다. 주변의 인연이 다한 것은 떠나고 생생하게 피 흘렸던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서 엷어져 이제는 편안하게 흘러간 역사를 담고 있다. 휘어진 가지는 휘어진 채로, 과거와 역사는 되돌릴 수 없지만 포용하는 마음의 연못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편안하고 아름답다.
사물을 연못에 비추어 보고 반추하고 표현하는 것을 문학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연못에 비친 삶이 때로 실제보다 더 선명한 것은 투사하는 빛 때문이리라. 어떤 사람들은 빛을 보지 않고 비추어진 영상만을 보지만 본성을 볼 수 있는 빛이 있기에 우리는 삶을 담아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투사하는 빛의 깊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오래도록 울려주는 문학 작품이 만들어질 것이다.
세대가 바뀌고 이제는 잘 구성된 소설이나, 희곡, 시 같은 순수 문학 장르뿐 아니라 노래 가사에 이르기까지 넓고 깊이 있게 세상의 모습을 비춘 빛을 찾아, 또 그 모습을 오래도록 함께 한 영향력을 감안해서 문학상도 수여되고 있다. 금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봅 딜런은 그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 ……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다네,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작은 나무가 큰 나무가 되어서 바람 속에서 정령을 만나듯이, 우리들 삶의 근원적 질문들도 각자가 연못에 비추인 우주를 헤아리면서 그 답을 얻게 될 것 같다. 아니, 우리는 어쩌면 답을 얻을 수 없어도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들을 계속해 구하며 함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 종합(윤우향)
윤우향 / 수필가, 호주문학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