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의 인생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탈수까지 잘 끝났다고 삐삐음이 울려 꺼내보니 깨끗이 빨아져 나왔다. 삶에 붙어있던 군더더기가 다 없어졌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물론이고 고맙게도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다 제거된 채로. 얼마 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꿈으로만 그려왔던 미니멀리스트(minimalist)의 삶에 도전해 보고픈 그녀가 도움을 청해왔다. 나도 관심이 있던 차에 두 달 넘게 같이 지내며 그 과정을 함께 했다. 이 간소하다는 생활방식이 홀로 남겨진 그의 생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자못 궁금한 가운데 벌써 우리는 충분히 흥분해 있었다.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무엇이 소중한지를 알아 그 외의 물건들을 과감하게 줄이며 사는 미니멀리스트들을 늘 동경해 오던 그녀였다. 국내는 물론 해외 여러 곳을 여행 다닐 때마다 머무는 숙소에서 유난히 편안함을 느껴왔기 때문이라고. 바로 누울 수 있게 준비되어 있는 침대와 비어있는 옷장의 매력에 흠뻑 빠지곤 했었다니. 여행가방 속에서 옷가지들을 꺼내 걸고 나면 옷들이 헐렁헐렁하게 매달려 춤을 추었다고 했다. 홀가분하게 근처를 구경하고 또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도 간단했단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이렇게까지는 아니어도 비슷하게라도 해보리라 결심해 보았지만 남편과는 의견이 사뭇 달랐다고 속상해 한다. 작은 종이 한 장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 온 세월이 60여 년을 훌쩍 넘겼음에랴.
먼저 우리는 책장 앞에 섰다. 다 꽂아지지 않아 틈새로 끼워 넣은 책들까지 빼곡하다. 하나씩 들춰보며 더 이상 읽을 것 같지 않다며 빼어 놓다보니 거실로 한 가득이다. 기본 회화를 꼭 익혀 다음 여행엔 활용하려고 구입했다던 영어회화책, 그 옆엔 불어회화책도 있다. 여행을 다니며 간단한 대화는 직접하고 싶은 욕심에서라고. 게다가 남편의 이것저것 모아두는 습관 덕분에 여행지에서 생긴 지도, 티켓 등 상자가 넘친다. 여행 떠나기 전에 준비한 많은 자료에 돌아올 때 챙겨 온 팜플릿까지. 아마 언젠가 그곳에 다시 가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제법 오랜 세월 여행을 다니다 보니 집안 구석구석 다녀 온 흔적들이 많다. 냉장고 문에는 기념품으로 사모은 자석들로 꽉 차있다. 추억은 그냥 추억으로만 간직해도 될 것 같아 버리기로 한다. 그 때를 떠올리며 하나씩 떼어낸다. 에펠탑, 개선문, 캥거루, 그랜드캐년, 옐로우스톤, 뉴질랜드 양, 후지산 등등. 문짝엔 자국만 남는다. 물티슈로 그 흔적을 닦아낸다. 이렇게 냉장고는 하얀 속살을 드러냈고 추억여행은 끝났다. 무엇이든 일단 보관하기를 좋아했던 남편의 케케묵은 서류철들. 분명히 모아두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필요할 때 어디에 두었는지 못 찾을 때도 종종 있어 안타까워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했다. 이렇게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몽땅 내어놓다 보니 책장이 텅 비었다. 아예 책장도 치웠다. 너무 많은 것은 없는 것과 같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거실엔 TV와 소파만 남겨졌다.
이번엔 장롱을 연다. 앞으로 한 번이라도 더 입게 될까봐 버리지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양털코트, 자녀들과 손주 결혼식 때마다 새로 지어입은 고운 한복들, 선물로 받았지만 아직 상자 그대로 고이 모셔둔 얇고 두꺼운 내복들, 반액세일이라 무조건 사 놓았던 옷들은 상표가 그대로 붙어 있다. 지난 십여년 동안 한두 번 밖에 입지 않은 옷들도 여러 벌이다. 쌓여있는 옷가지 중에는 처음 본다는 것들도 꽤 나온다.
우리는 커피 한잔씩 마시며 잠시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때 부엌 상부장이 눈에 들어왔다. 대식구가 함께 였을 때부터이니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그릇들이 잠자고 있을까? 심호흡을 하고 장을 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그릇들을 솎아 냈다. 그랬더니 밥그릇과 국그릇 접시들이 정갈하고 여유 있게 자리하게 되었다. 장문을 잠시 닫았다가 다시 열기를 해보니 달라진 모습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겉에서는 안 보이는 공간이지만 열 때마다 포개져 있는 그릇 가운데 필요한 그릇 꺼내기가 쉽지 않았었다며 내친김에 하부장도 열어 냄비 후라이팬 뚝배기 등 같은 종류로는 한두 개씩만 남기고 다 꺼내놓았다. 그 날도 우리는 아파트 한쪽에 마련된 재활용 코너를 여러 번 들락거렸다. 어느 날은 오후에 다시 갔을 때 아침에 내 놓았던 라디오 믹서기는 벌써 필요한 사람 손에 넘겨진 것을 알았다. 베란다 벽장속 깊숙이 넣어둔 여행 가방, 선물로 받아놓고 미처 사용하지 않아 상자채 놓여있는 그릇들 그리고 아끼던 항아리 등은 옆집 새댁에게로 갔다.
과유불급(過猶不及-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이라했던가. 집 안 구석구석 무엇이 있는지 조차 모를때는 물건이 주인인 셈이었다. 무조건 보관하던 창고 개념의 집에서 꼭 필요한 분량만큼만 있는 집으로 변신한 후 손톱깎이부터 우산에 이르기까지 소재를 전부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의 하루는 시작부터 힘차다. 넓어진 거실에서 훤해진 베란다를 통해 본 바깥풍경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조차 여유롭다. 과거를 붙잡고 있던 잡동사니가 다 없어지면서 혼자 살아야하는 삶에 자신감까지 솟아난다했다. 청소하기가 쉬워졌고 남아있는 물건 하나하나가 소중해지고 게다가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냥 집에 머무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될 정도로 이제는 여행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친정어머니를 뒤로 하고 나는 시드니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 ‘프랑스 컬러링여행’이라는 색칠놀이 책과 36가지 색연필을 남겨 놓고서.
차수희 / 수필가, 시드니 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