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이 시작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백신이다 봉쇄령이다 부스터다하며 시끌벅적하는 동안에도 무심한 세월은 줄기차게 흘러가 어김없이 새해는 도래했다.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되는 일년이라는 시간은 창조주가 정한 건 아닌데 기원전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가 달력을 만든 덕분에 올해 또 나이 한 살 더 먹게 되었다. 덧없이 나이만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괜시리 시저 탓을 해본다. 어렸을 때나 젊은 시절에는 떡국을 먹고 나이 한 살 더 먹게 되는 새해가 마냥 즐겁고 희망에 차있었다. 새해의 다짐을 하며 꿈을 꾸고 원대한 포부를 성취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비록 작심삼일만에 삼천포로 빠진 적이 있기도 했었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며 지금에 이르렀다. 내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점점 짧아져 가니 이제는 새해의 다짐이라기보다 희망사항이라고 해야 옳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한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해까지 따라와 3년째로 계속되는 팬데믹이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 하니 슬퍼진다. 봉쇄령이 내려 집콕하며 사람들과 만날 수 없었을 때 얼마나 답답했던가. 그야말로 사면초가 상태가 아니었던가. 2001년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한 미국의 911 테러사건으로 인하여 세상이 더 이상 예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서로 끌어안고 위로하며 비극을 극복하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었건만 바이러스의 힘 앞에서는 그야말로 ‘뭉치면 죽고 흩어져야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마음이 편치 못하다.
지난 12월초 뮤지컬 ‘Come From Away’(외지에서 오다) 공연을 관람했다. 미국의 911 테러 당시의 이야기로 일년 전에 보려다가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었는데 다시 진행하게 되어 재빨리 티켓을 구입했다. NSW 정부에서 12월15일부터 코로나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사람들도 밖에 나다닐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한다는 바람에 그 전에 서둘러 관람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뮤지컬이 성탄절 전에 다시 취소되었으니 우리 모녀는 운이 좋았다고 할까. 실화를 배경으로 등장인물도 실제 이름을 사용한 뮤지컬은 관객들에게 눈물과 웃음을 선사했다.
911 테러사건 당일 미국으로 향하던 38대의 항공기에 93개 국적의 7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 비행기들이 착륙할 예정이었던 공항이 폐쇄되었다고 조종석의 파일럿들에게 긴박한 연락이 왔다. 그들은 캐나다 최동부 뉴펀들랜드 섬에 있는 갠더(Gander)라는 작은 타운에 위치한 공항으로 방향을 돌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당시 인구 9,300명의 작은 타운에 갑자기 7,000명이 들이 닥친 것이다. 그들은 수하물 없이 몸만 내렸다. 호텔방은 다 합해도 침대 500개뿐. 모든 학교, 체육관, 커뮤니티센터가 임시 숙소가 되었고 아이스하키장은 냉장고로 탈바꿈했다. 인근 타운을 포함하여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발벗고 나서서 도왔다. 옷가게 주인은 가게를 개방해서 맞는 옷을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고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에 나섰다. 떠나게 될 때까지 닷새를 지내는 동안 ‘첫 날의 낯선 타인 칠천 명이 셋째날은 칠천의 친구가 되었고 떠나는 다섯째 날은 칠천 명의 가족을 잃었다고 할 만큼 가까워졌다’고 한다. 주민들이 합심하여 사랑을 실천한 덕분에 전원 무사히 갠더를 떠날 수가 있었다. 지금은 뮤지컬을 통해서 그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갠더 사람들과의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필이면 우리 식구들은 팬데믹으로 봉쇄령이 내려 모두 집에 갇혀 있으면서 식구 중 한 사람만 하루에 한번 식거리 구입이나 의료목적 등을 위하여 외출이 허용되던 때에 이사를 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이었다. 26년 살던 집을 떠나오며 우리도 데려가 달라는 듯 보이는 정든 식물들을 화분에 삽목하니 이삿짐 트럭에 겹겹이 쌓아 올릴 수가 없어 트럭 한대를 더 빌려야 했다. 새 주소지로 힘들게 옮겨와 달랑 우리 세 식구가 박스더미에 둘러 싸여 있을 때까지도 가까이 사는 남동생마저 누나네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한여름인데도 간밤에 억수로 쏟아 붓던 폭우 때문인지 오늘은 초가을처럼 서늘하기까지 하다. 늦은 아침을 끝내자 나는 커피한잔을 내려 들고 서재로 와 오늘 읽을 책을 뽑아 든다. 그 동안 집콕으로 인한 내 생활 패턴 역시 많이 바뀌어져 버렸다.
911 테러 사건으로 뉴펀들랜드의 갠더에서는 뜨거운 인류애의 기적을 만들어 낸 사실을 뮤지컬을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었다. 개인사에서나 세계적인 인류역사는 가혹한 소용돌이가 거쳐갈 때마다 그 절망 속에서도 희망적인 반전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평화만이 지속된다면, 어쩌면 절실한 희망이나 발전은 고사하고, 무의미한 나태 속에서 지리멸렬 살다가 소멸할지도 모른다. 이제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세계를 위협하는 팬데믹으로 또 어떤 놀라운 깨달음의 기적이 일어날 지 지금은 숨죽여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한번 크게 출렁이고 흔들어낸 후에는 통에 담은 물건들도 질서가 유지되기 마련인 것처럼, 금년 한 해 어떤 재앙이 위협조로 다가온다 해도 지나간 후에 들어설 새로운 형태의 기적을 향한 희망을 기대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