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 지어 핀 벚꽃이 신기루처럼 한꺼번에 날아가 버린 바람 부는 어느 오후, 그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편하게 여행을 떠났다. 아직도 궁금한 것은 어떻게 그런 결혼이 가능했을까 하고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지만, 경제 성장통을 겪은 나의 세대로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진달래가 온 누리를 붉게 물들인 봄날에 그녀는 함양 조부자 집으로 시집을 갔다. 하지만 시집간 지 몇 달 만에 도망치듯 친정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집안 어른들은 머릿골을 싸매었다. 친정 발길을 끊게 해야 한다는 의견과 몰래 도회지로 보내야 한다는 낮은 소리가 밤새 오갔지만, 가문의 체통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그녀는 조용히 시댁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 서럽게 하얀 밤 그녀의 불행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던 머슴의 도움에 힘입어 도회지로 달아나 버렸다. 그 일로 인해 그녀의 친정 식구들은 입에 담을 수 없는 수모를 견디다 못해 그믐달이 떠오르기 전에 그녀처럼 짐을 쌌다.
봇짐 장사를 하며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는 박 노인이 다리를 놓아 그녀는 부잣집 외며느리로 들어갔다. 일찍 혼자가 된 시할머니와 청상인 시어머니, 두 과부가 큰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결혼 첫날부터 병약한 남편과는 별거하였다. 메밀꽃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던 밤,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기거하던 신랑이 색시를 찾아왔다. 시댁 어른들은 신랑이 각시를 못 만나게 서둘러 돌려보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노곤한 밤 눈썹 빠진 신랑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녀의 두려움은 하늘에 달했다.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그녀는 곁에서 지켜주던 머슴과 열여섯 촉 전등불이 어둠을 밝히는 도회지로 새 삶을 찾아 떠났다.
장성한 자녀들이 자연스럽게 짝을 만나 서로 아껴주며 잘사는 것이 대부분 부모의 바램일 것이다. 요즘 젊은이 중에는 선뜻 결혼을 하려고 들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어쩌다 들은 가슴 아픈 지난 시절 이야기 때문은 아니지 싶다.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한 몸 건사하기도 팍팍한데 배우자와 자식까지 거느리고 알 수 없는 미래를 헤쳐 나가야 하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지금이 좋으면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 일인 가구가 자꾸 늘어간다. 혼밥, 혼술이 더는 어색하지 않은 것이 요즘 세상이다. 비정상이 정상처럼 되어가는 세태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나 자신도 헷갈릴 때가 있다.
심한 흉년에 입 하나 덜기 위해 병든 남편에게 시집간 그녀가 밤에 외롭게 핀 달맞이꽃 같아 애잔하다. 갇힌 사회를 만나 인습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유리 조각을 삼키고도 광대처럼 웃어야 하는 천형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부모, 형제, 조카들이 낯선 도시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반세기가 넘도록 현수교처럼 자신의 두 팔로 기둥을 팽팽히 당기고 거센 물살을 온몸으로 품고 살았다. 그녀가 영겁의 업에 메인 중생들을 위해 절을 지으면서 두 손을 모으고 기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름난 사찰에 한숨으로 일구어낸 재물을 쏟아 부어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고 옛날의 모습이 재현되었을 때 자신의 꽃다운 시절이 되살아난 듯 감회가 컸을까.
내가 밟는 사찰의 산 그림자 안에 그녀의 아픔이 꿈으로 남아 있다. 하얀 수의 한 벌 없이 스님처럼 가버린 그녀.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쌓아온 관습이란 철옹성을 여린 가슴으로 녹여낸 먼 친척 할머니께 늦었지만, 홍살문 대신 희망의 파란 대문 하나를 세워 드리고 싶다.
송조안 /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