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의료의 핵심, PBS
호주의 의약품 지원제도인 의약품급여제도(PBS-Pharmaceutical Benefits Scheme)는 국민이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필수 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 핵심 정책이다. 하지만 제도의 구제적 문제와 개혁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최근 미국 대형 제약사들의 압박까지 더해지고 있다. 다가오는 선거를 앞두고 노동당(Labor)은 PBS 의약품의 환자 부담금을 현재 최대 31.60달러에서 25달러로 인하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는 생활비 부담을 겪는 국민들에게 환영받을 조치로 보인다.
미국과의 무역전쟁
한편, 미국과의 무역 관계 속에서 PBS가 또 다른 쟁점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행정부는 지난 2월 “상호 무역과 관세”를 강조하며 불공정하다고 판단되는 정책을 겨냥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 내 제약업계가 호주의 제약 정책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국 대형 제약사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미 제약업계의 주장
지난해 미국 제약사 협회(PhRMA-Pharmaceutical Research and Manufacturers of America)는 미 무역대표부(USTR)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호주가 의약품 강제 라이센스 제도와 불충분한 특허 보호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주장하며 호주의 PBS를 “시장 접근을 막는 장벽”으로 지적했다.
PhRMA는 의견서에서 호주의 “약한 특허법 집행”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PBS는 전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비용 효과성을 입증해야 하는 건강 프로그램 중 하나이며, 전체 보건 예산에 비해 투자 수준이 낮다”며, “미국 바이오의약품 혁신 기업들이 정부의 가격 책정 정책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강조, 경쟁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기 전, 특허 관련 분쟁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PBS에 신약을 등재하는 과정이 까다롭고 비용 효과성을 입증해야 하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이 단체는 호주를 포함한 5개 지역을 “감시 목록”에 포함시키고, 캐나다를 비롯한 19개국을 “우선 감시 목록”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거 바이든(Joe Biden) 행정부는 해외 시장 접근성과 지적재산권 보호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었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퀸즐랜드 공과대학교(QUT) 무역법 교수인 펠리시티 딘(Felicity Deane)은 “미국 제약업계가 PBS를 시장 접근을 막는 요소로 보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로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이 호주산 의약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딘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가 호주의 법과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면 국민들은 분노할 것”이라며 “호주는 국민의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는 사회적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PBS 규정은 외국 기업뿐만 아니라 호주 제약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며, PBS가 특정 국가에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다만, 오는 4월 발표될 미국의 새로운 관세 정책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호주 정부의 대응
호주 정부는 PBS를 지키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으며, 여야 모두 PBS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앤소니 알바니즈(Anthony Albanese) 총리는 미국 제약업계의 요구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우리 PBS는 절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ABC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호주의 국익을 지킬 것이며, 거대 제약사의 이익을 위해 PBS를 희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야당 지도자인 피터 더튼(Peter Dutton)도 로위 연구소(Lowy Institute) 연설에서 “PBS의 무결성을 지키겠다”며 “거대 제약사가 우리 건강 시스템을 좌지우지하도록 두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편, 야당 보건 담당자인 앤 러스턴(Anne Ruston) 의원은 “알바니즈 총리는 즉각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협상해야 한다”며, “이를 하지 않는다면 총리의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크 버틀러(Mark Butler) 보건부 장관 역시 “미국 제약업계의 압박이 우려스럽지만, 새로운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성 건강을 위한 지원 확대
최근 정부는 PBS에 피임약과 난임 치료제, 자궁내막증 치료제를 추가하겠다고 발표했다. 5월부터 프로게스토겐 단일 성분 경구 피임약 ‘슬린다(Slinda)’와 자궁내막증 치료제 ‘라이코(Ryeqo)’가 PBS에 등재된다. 정부는 약 10만 명의 여성이 슬린다를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4월부터는 난임 여성 치료를 위한 ‘페르고베리스(Pergoveris)’ 주사제도 PBS에 포함된다. 이 치료제는 특정 호르몬 부족으로 인해 임신이 어려운 여성에게 사용되며, 기존에는 한 번의 치료 주기에 최대 3,500달러의 비용이 발생했다. 지난 30여 년간 PBS에 추가되지 않았던 경구 피임약이 올해 처음으로 포함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정부는 2월 여성 건강 지원을 위해 5억 7,300만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야당도 같은 수준의 지원을 약속했다.
PBS 개혁과 과제
PBS의 약값 인하 조치는 모든 메디케어(Medicare) 가입자에게 혜택을 제공한다. 지난해 9월부터 약 300종의 의약품이 ‘60일 처방’ 대상으로 확대되면서 만성질환 환자들이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약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또한, 2022년부터는 PBS ‘안전망(Safety Net)’ 기준이 완화되어 연간 PBS 의약품 비용이 1,648달러를 초과하면 이후 처방전당 비용이 7.70달러로 낮아진다.
PBS의 구조적 문제와 한계
하지만 PBS는 여전히 복잡한 절차와 행정 문제로 인해 개선이 필요한 상태다. 1948년 도입된 PBS는 처음에는 연금 수급자와 일부 필수 의약품에만 적용되었으나, 현재는 국가의약품정책(National Medicines Policy)의 일환으로 확대되었다. PBS에 등재된 의약품은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며, 환자는 정해진 금액을 부담한다. 신약 등재 여부는 정부가 임명한 독립 전문가 그룹인 의약품급여자문위원회(PBAC)가 결정한다. PBAC는 의약품의 비용 효과성을 평가하고, 정부가 이를 보조할지를 권고하는 역할을 한다.

의약품 부족 문제
하지만 PBS에 등재되었다고 해서 모든 약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것은 아니다. 갱년기 여성들을 위한 호르몬 치료제와 ADHD 치료제의 공급 부족 사태는 오랫동안 지속돼왔다. 생산 문제로 인한 공급 차질이 가장 흔한 이유로 제시되지만, 구체적인 원인은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호주는 인구 규모가 작아 글로벌 시장에서 우선순위가 밀리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해외 공급망을 활용해 대체 의약품을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PBS 신약 등재 지연
PBS에 신약이 포함되려면 우선 치료제품목허가청(TGA)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TGA는 의약품의 안전성과 품질을 평가하며, 백신과 면역 치료제는 추가적으로 호주면역자문그룹(ATAGI)의 심사를 거친다. 그러나 PBAC는 연간 세 차례만 회의를 열어 신약을 심사하기 때문에, 시급한 의약품 부족 사태에 신속히 대응하기 어렵다. 보고서에 따르면, TGA 승인을 받은 의약품이 PBS에서 보조금을 받기까지 평균 591일이 걸린다. 지난해 11월 PBAC는 심사 대기 의약품이 급증하자 한 회의에서 검토할 수 있는 신약 개수를 제한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일부 암 치료제와 만성질환 치료제의 PBS 등재 결정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마크 버틀러(Mark Butler) 보건부 장관은 이에 대해 “정부는 PBS가 환자와 제약사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신속한 심사를 보장해야 한다”며 우려를 표했다. 야당 보건 담당 의원인 앤 러스턴(Anne Ruston) 역시 이에 동의하며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이번 연방 선거의 승자가 PBS 개혁이라는 복잡한 과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을 안게 될 전망이다.
이경미 기자 kyungmi@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