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직(天職)
매년 이맘때쯤이면 기대 반 근심 반인 학부형들이 필자를 방문한다. HSC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기인지라 마음이 조급해진 탓이다. 대개 인생은 그 사람이 가진 직업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이라, 직업이 곧 그의 생활이자 운명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아이들의 진로를 염려하여 필자의 조언을 구하는 내담자들이 곧잘 수긍하거나 만족하는 모습을 보면 적지 않은 보람이 느껴진다. 수년 전 상담하고 돌아간 이들이 다시 찾아와 자식들이 성공적으로 진학하고 졸업하여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고 고마워할 때면, 그들이 정해진 삶의 행로를 무리 없이 헤쳐 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한없이 뿌듯해진다.
성적이 우수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대체로 의-약학 계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의약 계통이야말로 평생 매진하려면 그에 걸맞는 적성과 지력, 체력을 동시에 타고나야 하므로 단지 사회적 성취나 체면 때문에 무턱대고 추구할 분야는 아니다. 마치 의사가 되는 것이 큰돈을 벌거나 출세하는 지름길이라도 되는 냥 여기는 풍조이지만 고(故) 이태석 신부처럼 남수단에서 봉사하다가 순교하다시피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시골 보건소에서 여여히 일생을 마치는 청빈한 의사들도 있다. 같은 전문의라도 정신과 의사라면 재물과 큰 인연은 없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의약업의 팔자를 타고나는 사람들은 재물 여부와 상관없이 어떻게든 그 계통으로 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가끔 유(酉)자를 유심히 관찰한다. 명리학에서 유(酉)자는 그 속성이 금의 기운을 띄는지라 흔히 유금(酉金)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의약계통 종사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글자가 바로 이 유금이다. 유금은 동물 중에선 닭이고, 물상으로는 가공된 보석이나 칼을 의미하며, 절기로는 풍요로운 수확철인 음력 8월에 해당하고, 방위로는 서쪽이므로 서방정토, 즉 불교를 상징하는 글자이다. 또한 백금, 술, 발효음식, 화장품, 약품, 병균 등을 의미하기도 하며 직업적인 면에선 의약업, 금융 계통 및 심리학과 관련이 있다. 유월에 태어난 사람들은 성격도 이와 같다. 칼 같은 성정이 있으므로 정확하게 핵심을 잘 찌르고 독설을 하는가 하면 냉정하게 맺고 끊는데 익숙하다. 분석력이 뛰어난 반면 다소 결벽증이 있으며 예민, 예리한 성정 때문에 쌀쌀맞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모든 의약업 종사자들이 이 유(酉)월에 태어났다는 뜻은 아니다. 유월에 태어난 이들은 살면서 이러한 것들을 우연히 접하거나 심취하게 되며 이러한 인연들은 본인이 간절히 추구하지 않아도 부지불식간에 자기 곁에 와 있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의사는 아니지만 과거 필자에게 상담을 받았던 두 여성이 있다. 한 사람은 40대의 주부이자 병리사였는데 본시 의학 공부나 관련 지식을 따로 쌓은 적이 없었다. 그저 우연히 어느 GP의 병원 리셉션에서 반년 정도 단순 업무를 돕다가 유난히 깔끔한 성격이 의사의 눈에 띄어 그의 주선으로 랩에 근무하게 된 것이었다. 바싹 마른 몸매에 창백한 피부며 조용한 행동거지가 그런 곳에서 차분히 샘플을 수집하거나 분석하면 안성맞춤인 성격으로 보였다. 다른 한 여성은 다소 투박하고 과묵하며 20대라는 싱싱한 나이에 비해 어쩐지 괴팍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 역시 간호학이나 병원 행정 등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데도 희한하게 대규모 정신병동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어쩌다 그런 곳과 인연이 닿았느냐 물었더니 그녀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딱히 병원에서 일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부친의 지인이 소개하여 그저 용돈이나 벌어 쓰자는 마음에 출근하였던 것이 수년 째에 달했단다. 그런대로 근무 환경이 만족스러우니 의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한단다. 두 사람 다 유월 출생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체적인 사주의 격이 의사가 되기에는 다소 부족하면 평범한 의료업계의 종사자로 그치기도 하지만 이들이 의지를 발휘해서 관련 계통의 학위를 취득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간다면 충분히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직이란 문자 그대로 타고난 직업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서 전공한 학문이 직업으로 곧장 이어질 것으로 믿지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우연히 하던 일이 공부로 연결되는 경우도 빈번하니 과연 천직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인가 한다.
김태련 / 현 김태련 한의원 원장,
태을명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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