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과 인식
어느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필자는 집 근처의 Cooks River를 따라 서너 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있었다. 말끔하게 정돈된 곳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간혹 우거진 버드나무며 홀로 부유하는 오리나 물새떼들, 고여 있는 물웅덩이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면 시간 가는 것을 잊어버린다. 사실 이 곳을 다녀간 독자들은 알 것이다. 강이라 하기엔 다소 협소하고 심하게 오염되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필자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보는 눈이 변하는 것 같다. 마음이 즐거울 땐 파리의 센 강처럼 서정적이지만 일진이 사나운 날은 그저 오물 투성이의 하수구쯤으로 느껴진다. 이쯤 되면 사물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는 말이 진리가 될 수밖에 없다.
걷다가 문득 옛 생각이 났다. 눈과 마음이 보는 세상의 차이는 소싯적 오랜 시간 필자가 놓지 못했던 화두 중 하나였다. 평소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던 사람이 어느 날 생을 비관하며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가 하면 누가 보아도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도사의 경지에 이른 듯 낙관일변도를 걷는 사람이 있다. 힘들게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청빈하게 살아가는 이도 있지만 다 쓰지 못하고 죽을 만큼의 재물이 쌓아두고도 남의 것을 탐내는 이들도 있다. 명리학에 입문하기 전 필자는 종종 의문을 품었었다. 왜 어떤 이는 남들은 얻지 못해 안달인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인지, 어찌하여 모두가 부러워하는 배우자를 떠나 그만 못한 이성에게 안기는 것인지, 또한 무슨 이유로 없는 자가 있는 자보다 당당할 수 있는지, 세상이 온통 수수께끼로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란 천태만상이기에 이 세상천지엔 필자의 작은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불가사의가 저 강변의 모래알처럼 존재할 터였다.
수 년 전이지만 필자가 뚜렷이 기억하는 사건이 있다. 약 1년간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려 왔다는 한 여성이 필자를 찾았다. 상담 클리닉을 운영하는 40대 중반의 심리상담사로 웃는 인상이 귀여운 벽안의 미인이었다. 대학 졸업 후 약 이십여 년 간 성실히 일과 공부를 병행해 왔으며 덕분에 이 분야에서 꽤 명성을 얻었노라고 했다. 필자 역시 그녀의 지성과 미모에 마음이 끌려 언젠가부터 정기적으로 한의원을 찾는 그녀와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벗어나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가끔 짜증 어린 눈물을 흘렸다. 이유인즉슨 골치 아픈 환자들로 인해 심신이 너무 지쳐버렸기 때문이란다. “모두 다 당장 자살하겠다고 아우성이잖아요?” 그녀가 투덜거렸다. “지난 이십년 동안 하루 열 시간 이상 나는 자살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왔어요. 정말이지 내가 자살하고 싶다구요.” 필자는 난처해져서 반문했다. “하지만 나는 늘 당신의 직업을 동경했었는데요. 여성이 종사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하면서도 프로다운 직종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필자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하자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천만의 말씀이에요. 환자들 중엔 과거에 범죄와 연루되었던 사람들도 많고 강간범도 있어요. 젊을 땐 미혼인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반지를 끼었답니다. 남편이 있어 보이면 그나마 안전하지 않을까 해서요.” 그녀의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필자는 한 때 심리상담사라는 직업을 선호하여 그 쪽으로 진로를 추구하지 못했던 것을 잠시 후회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심리학과 한의학을 결부시켜 연구하기도 했고 한 때는 사주심리학에 심취해 있었다. 정신 계통의 학문에 재능이 있다고 믿어왔던 나는 심리적 불균형과 관련된 문제만큼은 훨씬 쉽게 파악하고 도울 수 있으리라 확신했고 막연한 자신감에 충만한 나머지 상담사가 겪는 고충이나 잠재된 위험성은 미처 헤아려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생각이 많이 부족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비슷한 시기에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이 아들을 데리고 한의원을 찾았다. 아버지는 길게 한 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의 수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천연덕스럽게 기쁜 표정이었다. 낮선 곳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들에게는 선천적인 문제가 있었다. 십 팔세가 되도록 7살 어린이의 지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금발 머리와 주근깨 때문에 아들은 더욱 동안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정기적으로 홈닥터를 방문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과 의사, 상담사, 자연치료사들을 줄곧 찾아다녔지만 자폐증, 과대망상증, 발달장애, 언어 장애 등 그간 진단 받은 병명만 거의 열 개에 가깝다고 했다. 당연히 모두들 두 손을 들어버린 상태였다. 한의원이란 그에게 마지막 희망같은 것이었다. 마녀가 온갖 괴상한 재료를 넣고 주문을 외우며 수 시간 고아 만드는 걸쭉한 진액을 상상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필자를 찾아왔단다. 그 와중에 농담을 하는 그가 안스러웠다. 필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이 사주를 한 번 볼까 합니다.” (물론 그에게 나는 사주가 무엇인지 한참 설명해야 했다.)
아버지는 가까스로 동의했다. 그러나 심란했던 필자의 예상과는 달리 아들의 사주는 기이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 동안 아이는 꿈속을 노닐고 있었던가? 그의 사주에 펼쳐진 정경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것은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무지개 동산이기도 했고 기화요초가 우거진 산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강물이기도 했다. 아들은 동화 속에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 옆에 앉아 줄곧 알록달록한 그림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눈이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하게 반짝였다. 몽환처럼 신비한 그의 세상에는 아무런 제약이나 슬픔이 없어 보였다. 잠시 아이의 천진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다 필자는 말했다. “아들은 행복합니다.” 한 동안 멍해진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그는 공감하는 듯 했다. “이 아이가 무엇을 알겠소? 그저 행복하다니 내 마음은 편합니다.” 필자의 설명을 자세히 들은 후 그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아들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이는 손을 흔들다가 선물이라며 자기가 제일 아낀다는 카드 한 장을 내 책상 위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이쯤 되면 독자들도 인간사의 아이러니를 대략 눈치 챘을 법 하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는 했으나 환자들을 상담하다가 지쳐버린 한 여인과 환자였으나 천국에서 살고 있는 소년의 삶 중 누구의 것이 더 낫다 할 것인가? 타인의 육안에 비치는 피상적인 모습 뒤에 심안으로만 읽을 수 있는 진실이 존재한다면 어느 것이 참이라 할 것인가? 혹자는 장애자인 소년의 사주가 어떻게 그처럼 좋기만 한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체이듯 삶이란 현실과 이상이 어우러진 하나의 세계이다. 왕자를 꿈꾸었으나 현실은 거지였던 반면 거지의 옷을 빌려 입고도 왕자라는 신분을 결코 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처럼 인간은 누구나 현실과 분리된 꿈을 꾼다. 사주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좋아 보여도 홀로 불행해 하는 이들의 사주는 암울하기 짝이 없으나 모두가 비웃어도 늘 행복한 사람의 사주는 그 반대다.
결국 사주는 우리 눈에 보이는 외적 조건들을 넘어 주인공의 내면, 특히 그가 품은 꿈과 이상에도 포커스를 맞춘다.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들이라 해서 그 가능성까지 내려놓는 것은 아니다. 사유와 궁리로만 깨우쳐지는 이 명리학의 세계는 인간의 눈으로 쉬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주를 이루는 여덟 글자 속엔 세속의 기준으로 옳다 그르다를 단정할 수 없는 무한한 형이상의 세계가 있다. 즉 제삼자가 보는 한 인간의 삶은 정작 당사자가 느끼고 받아들이는 삶과는 다소 무관한 것이라 하겠다.
현 김태련 한의원 원장,
태을명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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