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로 ‘파종’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국을 떠난 이민자로 새로운 땅에서 한글 문학이라는 씨앗을 뿌리는 문학인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해 듣는다. - 편집자 말
‘열한 시간 날아가면 되는 거리를 몇 년을 그리워해야 다시 만날까’
김오의 시 <비>에 있는 한 대목이다. 그는 1987년 고향을 떠나 시드니에서 이민자로서 겪는 설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경계인으로서 느끼는 외로움을 <캥거루의 집>과 <플라밍턴 고등어> 두 시집에 담았다. 김오는 1993년 호주 동아일보 1회 신년문예에 <마당>으로 당선된 후 이듬해 <시힘> 동인지에 세 편의 시를 실으면서 본격적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9년 ‘자유문학’ 겨울호 신인상을 받은 데 이어 올해 2024년 동주해외작가특별상을 수상했다.
낯을 가리는 편인 김오는 동주문학상 수상 계기로 인터뷰를 하자는 제안을 그리 내켜 하지 않는 듯했다. 무엇보다 자신은 인터뷰를 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막상 질문을 시작하자 그동안 가슴 속에 쌓아 둔 것들이 많았던 때문일까. ‘시인의 생각’을 다 받아내기에 기자가 준비한 그릇은 넉넉하지 못했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시드니에서 열린 시상식 이후 10월에 들어서도 카톡을 통해 계속 이어졌다.

여러 문학 행사에서 얼굴 뵙기가 힘들었는데 시상식에서 만나 반가웠습니다. 수상 소감 부탁합니다.
- 아직 시인이라 불리기에 미흡한 사람이지만 가야 할 길이 남아있기에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염치를 무릅쓰고 받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외설악을 통해 노적봉에 오르는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요. 수상을 하고 나서 이 영상이 자꾸 어른거리더군요. 풍경이 아름다워 붙여진 게 아니라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공중에 발을 딛고 하늘로 가는 길이어서 붙여진 이름 같아요. 과연 한 편의 시가 제 길을 가기 위해 시인에게 필요한 장비는 무엇일까? 시인의 무기는 눈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눈물 한 방울 흘리면서라도 시를 써야 하는데 그런 경험은 없지만 울며 몸부림치며 외롭게 시의 길을 가는 시인, 이 산천을 위하여 가난하고 가련한 세상을 위하여, 외롭게 시의 길을 가는 시인이 보고 싶고 시를 위한 길은 바로 그런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오의 시 세계가 궁금했다. 고국을 떠난 어딘가에서 한국어를 붙들고 문학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시에 대한 시인의 생각과 시를 떠나지 않고 붙들고 있는 이유를 전하고 싶어 시작한 인터뷰였다. 어쩌면 ‘시를 쓰는 길’은 김오에게 있어 간절함을 넘어 소명인 듯했다.
본인 작품세계에서 어느 부분이 수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세요.
- 특별히 시 세계라 할 만한 게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주목 받을 만한 단계에 한참 못 미친다고 생각해요. 제게 시란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친구입니다. 상이 나쁜 건 아니지만 문학 하는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칫하면 문학하는 사람이나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명예의 노예로 전락할 위험을 다분히 갖고 있죠. 무슨 무슨 문학상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 그 때부터 상품이 되는 것 같아요. 격려가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우월감을 갖게 하기 쉬운 것 또한 사실이지요. 목표가 상을 받으려는 것은 아무리 포장을 해도 좋은 일일 수가 없습니다.
한국과 해외 문단에서 시드니 문학계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문학이 과거만큼 명예나 물질로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기에 매니아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대입니다. 문학 잡지들은 계속 문을 닫고 있습니다. 명목을 유지하기조차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드니에서 매년 ‘문학과 시드니’를 발간하니 관심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한국 문단이 보이는 보수성과 폐쇄성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장벽이 되지만 동시에 해외라서 특별 대우를 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문학은 작품으로서 말해야 하니 냉철한 대접을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칭찬으로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망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국의 시인들 틈에 서 있는다면 나는 맨 밑바닥에 한자리 낄 수 있을까. 그만큼 시를 잘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조심스러운 발언이지만 신춘문예용이나 무슨 무슨 문학상용 작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벌은 길들이는 제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학은 길들여져서는 안 되는 야성’이 중요합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세상 위해 외롭게 시의 길 가는 ‘이민자의 시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처럼 기성 작가들이 하는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는 문학인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좋아하는 시인의 작품 필사, 일상 수시 메모, 아침에 무조건 책상 앞에 앉기 등 좋은 시를 쓰기 위한 김오만의 방법이 있을까요?
- 좋은 시를 쓰는 방법이나 비결이 제게 있겠습니까? 딱히 시 세계라 할 부분이 없다 보니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첫 시집 내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본업이 뭐냐고 묻더군요. 내 본업은 예수를 믿는 일이고 생업으로 식품점을 하고 있다. 시를 쓰는 일은 부업이다, 이렇게 답했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시를 잘 쓰는 사람도 아니고 시에 목숨 건 사람도 아니고 살아가는 생활 다 하고 남는 시간에 쓰다 보니 생활과 관련된 것들을 쓸 뿐입니다. 다만 내 것을 계속 씁니다.
30대 초반 중동의 바레인에 나가 1987년 호주로 와 지금껏 노동 일을 하는 김오에게 있어 ‘내 것’이라는 것은 시집 <플래밍턴의 고등어>의 ‘고등어’처럼 노동하면서 살아 낸 ‘이민자의 시’이다. 평생 시를 써온 분들, 시 밖에 모르는 시인들과 견줄 일은 없다면서도 필사에 대해서는 “시에 어떻게 생명을 불어넣는지를 느껴보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표절하는 방법에 익숙해질 수도 있다. 어떤 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살아있는 아름다운 생명체인 시에 감금되는 것”이라며 필사에 대해 우려하는 마음도 내비쳤다.
시를 쓰면서 좌절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좌절하게 하고 그럼에도 시를 계속 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좌절보다는 한계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첫번째는 제대로 시를 많이 읽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 먼저라서 시간이 절대 부족하니까요. 둘째는 본업인 예수를 믿는 일이 사실 제일 큰 문제입니다. 신앙심을 억누르려는 시와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힘이 맞물릴 때에 두 힘을 조절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요. 진정 시에 목숨을 건 시인들은 이 문제로 고민하지 않겠지만 저 같은 경우는 달라요. 신앙과 시가 지향하는 목표가 같을 때는 두 힘이 맞물려 더 좋은 시어로 나오지만, 두 힘이 힘겨루기에 들어가면 곤혹스런 일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어느 한 힘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곤 합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시가 고개를 내밀 때가 바로 그런 한계에 부딪히는 때인 것 같아요.

종교와 시의 힘겨루기, 또 본업으로 인해 힘들고 시간이 없어도 그런 한계에서 시를 계속 쓰게 하는 것을 김오는 “많은 시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시가 내게로 온 것”이라고 했다. “좋아하다 보니 생각이 그리로 가게 되고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않아도 늘 마음이 그 쪽을 향하다 보니 그곳에서 시가 그를 찾아준다”고 덧붙였다.
가장 좋아하는 시인과 시 한 편을 고른다면?
- 누구를 콕 집어 말하기 어렵습니다. 신경림, 김명인, 이상국, 김신용, 기형도, 박철, 고정희, 함민복, 송경동, 이재무, 문정희, 김초혜, 맹문재, 허만하, 천양희, 진은영, 이렇게 많은데 여기서 누구를….. 그 중에 그래도 고른다면 박철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이상국 ‘국수가 먹고싶다’, 허만하 ‘그리움은 물질이다’, 고정희 ‘하늘에 쓰네’, 김신용 ‘도장골 시편 -민달팽이’ 그리고 김명인 ‘칼새의 방’을 고를 수 있어요.
가만히 있으면 좋아하는 시인 이름이 끝없이 나올 것 같았다. 제대로 시를 많이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좌절을 느낀다고 했지만 시 쓰기가 부업이라도 생업 이상으로 그의 품을 내어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오는 <풀잎>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랑받는 나무가 아닌
풀은 땅을 기어야 한다
고개를 들면 뿌리째 뽑힌다
그래도 꼿꼿이 서는 풀들이 있다
‘뿌리째 뽑히지 않고 꼿꼿이 서는 풀’은 이민자라는 운명을 인정하면서도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살아내는 풀이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 경계선에서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그는 그렇게 자기 시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전소현 기자 herald@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