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과 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보고 웃는가 하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보고 웃는 건 괜찮은데, 우리 자신이 웃음거리가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다시 풀자면, 내가 타인을 보고 웃으면 희극이 되겠지만, 내 자신이 타인의 웃음거리가 되면 비극이 된다는 말이다.
얼마 전 이유극단 전 멤버들과 술을 마셨다. 기분 좋게 마시고 있는데 옆 옆 테이블에 앉은 중년 신사분이 과하게 드셨는지 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좁은 공간이라 3, 4개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타인의 사람들은 ‘어… 어’ 하면서 걱정된 소리를 냈다. 일행으로 보이는 한 분이 대신 ‘미안합니다. Sorry Sorry’를, 손을 들어 미안한 제스처를 보였다. 처음 분위기는 걱정 반 관심 반의 공포의 소리가 나왔지만, 정작 쓰러진 본인이 일어날 듯 말듯하면서 움직임이 계속되자 공기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쓰러진 본인도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일으키지 않는 동행인들의 분위기가, 급기야는 손님 중 중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의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술 취한 분이 넘어지면서 두 손을 뒤로 제쳤던 모습을 반복해서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딱 봐도 20대 초반이었다. ‘어… 어’의 걱정이 ‘하… 하’의 웃음으로 바뀐 것이다.
앙리 베르그송(프랑스 생명철학가)은 웃음에 관한 에세이에서 사람이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지는 이야기가 웃기는 것은, 당한 사람이 별안간에 자동인형처럼 움직이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유연성의 부족으로 혹은 잠시 정신을 팔다가 또는 몸의 경직성 때문에, 요컨대 신체의 둔화나 이미 실려진 속도의 결과로 상황이 다른 것을 요구했을 때 근육은 하던 운동을 계속해서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 술 취한 사람이 넘어진 이유이며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린 까닭이다. 즉 ‘기계적인 행동을 보면 도저히 웃지 않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그맨이나 코미디언들의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유행어’,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캐릭터’ 등을 생각하면 베르그송의 웃음의 개념을 알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희극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고 비극도 있다. 아니면 비극이 희극이 되고 희극이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술집에서 일어났던 작은 소동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희극으로 사라질 것이다. 만약 넘어지면서 크게 다쳤다거나 싸움이 났다거나 했으면 비극이었을 상황이, 술자리에서는 있을 수 있는 작은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입장 바꿔서 그 넘어진 사람이 우리 멤버였다거나 우리와 친한 인간관계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과연 비극에서 희극으로 넘길 수 있었을까? 아니면 계속 비극으로 아니면 희극으로. 또는 이 상황을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 또는 예능으로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희극이 될지 비극이 될지는 관객 판단에 맡겨야하겠다. 앞에서 말했듯이, 아마도 타인의 일이면 희극이 되겠지만 우리 자신의 일이면 비극이 되는 것처럼.
제목 ㅅㅂㄴ
엄마가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면서 쓰러졌다. 머리를 싸매며 딸을 불렀다.
엄마: 아빠한테 전화해. 빨리!!! 병원 가야겠어.
딸: (서두르며 엄마 모발폰을 찾는다)
엄마: 너 모발폰은 어디 두고?
딸: 내 방에 있지. 지금 급한데 내거 너거 어딨어? (모발폰 스크린을 오르내리면서) 아빠 . 아빠. 아빠 . 뭐야 아빠 이름 뭐로 저장해 논거야?
엄마: ㅅㅂㄴ 찾아.
딸: ㅅㅂㄴ(모발폰을 위아래로 스크롤 한다) ㅅㅂㄴㅅㅂㄴ시옷이면 시..발..놈??? 엄마!!! 아빠 이름을… 도대체… 시발놈이 뭐야??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엄마: 아냐! 시발놈이라니? 서방님이야. 서방님
작은 소동 속에서도 항상 비극과 희극이 공존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강해연 / 이유 프로덕션 & 이유 극단(EU Production & EU Theatre) 연출 감독으로 그동안 ‘3S’, ‘아줌마 시대’, ‘구운몽’ 등의 연극과 ‘리허설 10 분 전’, ‘추억을 찍다’ 등의 뮤지컬, ‘Sydney Korean Festival’, ‘K-Pop Love Concert’ 외 다수의 공연을 기획,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