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아버지
하필이면 인생에게 가장 기쁜 날, 아버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을까?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 발표날이 됐다. 아침 일찍부터 전화로 확인하려 했으나 잘 연결되지 않았다. 통화 물량이 폭증하면서 발생한 어려움이었다. 매 순간 마음이 타 들어갔다. 아버지는 뭐든 후다닥 해치우는 급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당장 서울에 가서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라고 했다. 곧장 영천 기차역으로 달려가 새마을호에 몸을 실었다. 3시간 반을 달려 서울역에 도착했다. 다시 전철과 버스를 타고 관악구에 있는 대학교까지 갔다. 벌써 늦은 오후였다. 긴장과 떨림으로 사회대 현관에 붙은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다. ‘ㅈ’에서 ‘정’으로 ‘정’에서 ‘동’으로 내려오는데 내 이름이 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뻥하고 기쁨이 터졌다.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몇 시간 졸였던 마음이 확 풀렸다. 발뒤꿈치에서 용수철이 튀어나와 하늘로 붕 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집에 전화해서 기쁜 소식을 전했다. 아버지는 이미 담임 선생님을 통해 확인했다며 조금은 담담했다. 신입생 등록 절차를 알아보고 밤차로 영천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합격자 명단 주위에는 선배 여럿이 나와 합격생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기 갔더니 저녁에 간단한 환영회가 있다고 했다. 선배와 동기를 미리 만나 두면 학교생활에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신림동 대학촌에 있는 허름한 학사 주점에 열댓 명이 모였다. 부대찌개로 저녁을 먹고 두부김치 안주에 소주를 마셨다. 선배는 학과에 대해 설명하고 신입생은 자기 소개를 했다. 다들 강한 인상을 남기려고 애쓰는 바람에 장기 자랑을 방불케 했다. 내 순서가 되자 나는 “길냇골에서 온 촌놈”이라고 하며 “잘 부탁합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길냇골’은 길 영(永)과 내 천(川)을 쓰는 고향 영천(永川)을 순우리말로 풀이한 이름이다.
선배들은 재미있는 녀석이 들어왔다며 소주를 권했다. 태어나서 처음 마시는 술이었다.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약간 씁쓸하고 달싹했다. 그렇게 술을 들이켜면서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강렬한 소속감을 느꼈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다. 전화를 하려면 밖으로 나가 공중전화를 찾아야 했다. 어느 순간 기억이 툭 하고 끊어졌다.
다음 날 아침 잠을 깼다. 어제 처음 만난 선배가 사는 자취방이었다. 옷가지가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다. 입에서 구정물 냄새가 났다. 옆에 다른 신입생 두 명이 쓰러져 자고 있었다. 선배에게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어젯밤 인사불성 상태로 술상에 올라가 헤엄을 쳤다고 했다. 합격했다는 기쁨에 겁 없이 술을 마시다 결국 사고가 났다. 그때서야 부모님 생각이 났다. 밤차로 돌아올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텐데…
선배가 해장으로 끓여준 라면을 먹고 자취방을 나섰다. 공중전화기로 집에 전화했다. 수화기 너머 아버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 걱정으로 밤새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간단하게 어제 일을 설명했다. 아버지는 내가 무사함에 안심하면서도 분통을 터뜨렸다.
“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느냐? 부모 생각은 나지 않더냐?”
그저 용서를 빌고 빌 수밖에 없었다. 별 소용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막 행동한다면 아예 집을 나가라는 매몰찬 말까지 들었다. 언제나 내 편이던 아버지가 냉담하게 대하는 태도에 나도 서러웠다. 아무 일 없이 멀쩡하게 돌아왔으면 되지 않나? 단지 술 때문인데 빚어진 일인데, 하는 반발심마저 들었다.
그날 저녁 말없이 집을 나왔다. 옆에 있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소나무 아래에 솔잎을 깔고 누웠다. 밖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불만을 아버지에게 표시하려 했다. 누워서 본 밤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골목에서 나를 찾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또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옷에 붙은 솔잎을 털어내고 집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어디 갔었냐고 묻길래 운동장에 산책 갔다 왔다고 얼버무렸다.
며칠이 지나고 아버지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다시 한번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간 아들 걱정에 지옥 같은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부모를 생각하지 않은 아들에게 배신감마저 느꼈다고 했다. 아무 일이 없으면 괜찮은 그런 일이 아니었다. 그 뒤로 그런 식으로 아버지를 걱정시킨 적은 없다. 어디를 가든 꼬박꼬박 행선지를 밝히고 중간보고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35년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커다란 틈을 만든 술과는 인연이 끊어졌다. 호주로 이민 오면서 같이 마실 친구가 없는 데다 아내가 음주를 탄압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둘이서 아이 넷을 낳아 키우며 여유 없이 살았다. 고향에서 늙어가는 부모님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맨정신이었으나 술에 취해 아버지를 까맣게 잊었던 그날 밤과 다를 게 없는 세월이었다. 아버지는 아들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날 밤처럼 남은 인생을 보냈다. 멀리 타국으로 떠난 자식을 향한 애틋한 시선을 단 한 번도 거두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준 술은 더 이상 내 인생에 없다. 술 때문에 아들에게 지독한 실망감을 느꼈던 아버지도 이제 이 세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