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한국신문) 정동철 기자 = 아버지날인데 태어나서 처음 홀로 연극을 봤다. 대한민국 대표 ‘모노드라마’라는 ‘염쟁이 유씨’였다. 어디를 가나 꼰대 취급을 받는 50대 남성에게 꼭 맞는 연극이다 싶었다. 150석 소극장에는 관객이 꽉 찼다. 더러 지인이 눈에 띄었다. 아내와 딸과 아들 셋, 크다면 큰 가족이다. 아버지날에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 준 이들은 내 곁에 없었다.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어쩌다 이런 꼴이 됐나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날에 외톨이 신세로 ‘염쟁이 유씨’를 만나게 된 데에는 아내 탓이 컸다.
호주에서 매년 9월 첫째 일요일은 파더스데이(Father’s Day)다. 여성권이 인권을 넘어 ‘강권’으로 치닫는 남반부 호주에서 남편들이 조금 기를 펴는 날이다. 이날만은 아버지가 가족의 중심에서 무엇이나 떳떳이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 막내 아들에게 안마를 시키고, 큰 아들에게 포옹을 요구하고, 딸에게는 데이트 신청도 한다. 아이들은 평소에는 징그럽다고 손사래 칠 일을 순순히 들어준다. 그렇다고 5월이면 온 나라를 축제 분위기로 몰아가는 어머니날, 마더스데이(Mother’s Day)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저 자식들과 소박하고 절제된 사랑과 감사를 나눌 수 있으면 충분히 행복하다.
올해 아버지날 9월 1일은 시작부터 황량하였다. 2주 동안 유럽 크루즈 여행을 갔던 아내와 딸이 자정이 넘어 새벽에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여행용 가방 몇 개가 입을 쩍 벌이고 온갖 잡동사니와 옷가지를 토해내고 있었다. 온통 뒤숭숭해서 도무지 사랑과 감사라는 아버지날 주제를 조성하기 힘들었다. 여독에 절은 아내는 간단하게 아침 식사로 축하를 하자고 했다. 나는 아침은 어렵고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큰아들이 곧장 난색을 표했다. 저녁에 약속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날에 딴 약속을 잡다니 어머니날이면 감히 생각하지 못할 폭거였다. 상할 대로 상한 마음에 밥, 선물, 용돈 다 필요 없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가족들은 다들 자기 볼 일 보러 나가고 집에서 먹먹한 대낮을 맞이했다. 남자는 50살이 넘으면 서러움만 남는가 보다. 불만은 끓어오르는데 들어줄 귀가 없어 입으로 내뱉지 못했다.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냉장고에 있는 계란, 순두부, 숙주를 털어 넣은 특제 라면이었다.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입으로 넣는데 곤궁함이 가슴을 헤집었다.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뱅스타운 아츠센터에서 3시에 시작하는 ‘염쟁이 유씨’를 보려면 그때 출발해야 했다. 일찍 나가 봐야 갈 데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시간이 꾸역꾸역 흘러 2시가 됐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물 한 병을 가방에 넣고 차를 몰았다. 멀리 뱅스타운까지 혼자 연극을 보러 가는 상황이 문득 비현실로 다가왔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연극을 보려고 했다. 보름 전 표를 예매하려던 참에 아내가 이틀 뒤 딸과 유럽 여행을 떠난다는 폭탄 발표를 했다. 몇 달 전에 예약했을 텐데 출국을 이틀 앞두고 알려준 것이다. 여러 변수가 있어 진작 알리지 못해 미안하다는 해명이다. 나에겐 치열한 생활전선에서 함께 싸우던 전우가 갑자기 휴가를 떠난다는 소식이나 다름없었다. 차가운 침묵으로 아내와 딸을 보냈다. 그들이 런던, 파리, 베를린, 루체른, 로마, 피사, 암스테르담을 휘젓고 다닐 때 나는 아들 셋과 홀아비 생활을 꾸렸다. 상처 입은 마음에 연극은 나만 보기로 했다.
햇볕이 유난히 따가운 일요일 오후, 뱅스타운 아츠센터는 동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미학을 풍겼다. 광장에는 현대식 조형물이 놓여 있고 진갈색 목조를 사용한 외벽과 빨간색 테두리를 한 유리문은 세련돼 보였다. 센터 로비에는 한국 관객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입장권을 확인하고 안내지를 5 달러 주고 샀다. 표지는 ‘염쟁이 유씨’ 연극 포스터이고 나머지는 교민 문화단체 소개였다. 더 스테이지, DKB Arts, 이유 극단, W 뮤지컬 엔터테인먼트, Sky J Theatre, 호주 한인극단, 한호방송협회, 한호전통예술문화협회. 작은 교민사회에 이렇게 많은 문화 예술인이 있다니 놀라웠다.
공연장으로 들어가니 무대가 보였다. 가운데에 병풍과 관이 놓였고 왼쪽에 염을 하는 탁자, 오른쪽에 작은 의자와 아버지, 어머니, 아기로 보이는 헝겊 인형 셋이 허공에 걸려 있었다. 요요히 빛나는 조명 아래 시신을 염하는 장소를 재현한 무대는 숙연함을 자아냈다. 앞으로 저 공간에서 삶과 죽음은 어떤 모양으로 드러날까? 무대 장치마다 어찌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안간힘을 쓰는 가련함이 배여 있는 듯했다.
연극이 시작되고 주인공 염쟁이 유씨가 등장했다. 그는 나오자마자 속사포 수다를 뿜어냈다. 먼저 관객들로 하여금 핸드폰을 끄도록 집요하게 유도했다. 묵음으로 하거나 진동으로 두는 경우를 꼭꼭 집어 결국 핸드폰을 꺼내 파워 단추를 꾹꾹 누르도록 했다. 나 역시 끝까지 버티다가 유씨가 분출하는 입담에 눌려 전화기를 침묵 속으로 밀어 넣었다. 배우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보통 사람과 달리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유씨는 염쟁이를 취재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자신과 주거니 받거니 연극을 진행하는 ‘장 기자’ 역에 관객 중 하나를 소환했다. 그 순간 연극은 모노드라마에서 관객 참여극으로 돌변했다. 맨 앞줄에 앉은 유일한 남자 관객은 졸지에 기자가 돼 판소리 명창과 장단을 맞추는 고수처럼 연기했다. ‘장 기자’ 뿐 아니라 유산을 두고 싸우는 삼남매와 며느리, 유씨와 술잔을 기울이는 이웃 역할에 관객들이 차출됐다. 다들 단단히 마음먹고 왔는지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다. 잘하든 못하든 최선을 다해 반응하고 이 과정에서 ‘염쟁이 유씨’는 마당놀이처럼 관객과 끊임없이 호흡을 맞추며 매듭을 풀어가는 서사를 완성헸다.
유씨 역을 맡은 유순웅 배우는 1인다역을 능란하게 펼쳤다. 염쟁이 가업을 맡지 않으려고 떼쓰는 아들 역할을 하다가, 휙 의자에 앉아 모자를 쓰는 순간 그의 아버지가 되어 아들을 다독였다. 쌀을 찾으러 병풍 뒤로 들어가더니 장례 사업 판촉을 하는 장사치로 변신해 무대를 뒤흔들었다. 남녀노소 저마다 다른 배역을 한 사람이 이리저리 연기하는데 분신술이라도 쓰는지 자연스러웠다. 모노드라마를 하는데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눈물 글썽이다가 웃음 터지기를 몇 번 되풀이하다 보니 어느새 연극이 주는 흥에 젖었다.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았는데 앞자리에 남자가 적어서 유산 놓고 싸우는 자녀 중 장남 역할이 주어졌다. 뒤로 빼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리라 결심하고 무대로 나갔다. 상주 굴건을 쓰고 관을 둘러싸고 형제 간에 유산 다툼을 하는 장면에서 몸짓 연기를 했다. 대사는 유순웅 배우가 하기에 말하는 시늉만 하면 됐다. 무대에서 직접 경험하는 연극은 실제 삶 못지 않게 치열했다. 몸과 몸, 말과 말이 좁은 무대에서 부딪히며 사람과 세상의 진실을 그려냈다.
염쟁이 유씨가 시신을 염하는 장면에서 작년 초 돌아가신 아버지 입관식이 떠올랐다. 한평생 몸에 새겨진 기쁨과 아픔과 사연이 흰 천에 둘둘 감겼다. 눈이 내리면 세상에 가득한 우여곡절이 하얗게 변하는 것처럼 죽음은 모든 것을 닫고 덮고 매듭지었다. 이루지 못한 꿈, 꽃 피우지 못한 사랑, 다시 만나지 못한 그리움, 끝내 닿는데 실패한 마음이 얼기설기 얽힌 채 별안간 완결됐다.
연극 말미에 유씨는 염쟁이로서 마지막 염을 한 시신이 자기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순간 객석은 묵직한 슬픔으로 무너졌다. 이미 무대와 객석, 연극과 현실 사이에 놓인 경계는 사라졌다. 유순웅 배우는 연극 배역이 아니라 실제로 70세까지 ‘염쟁이’ 삶을 산 ‘유씨’라는 인물로 기억됐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안고 90분 동안 달려온 유씨의 드라마 앞에서 죽음은 고귀하고 인생은 아름다웠다.
무대 조명이 켜지고 관객이 박수 치는 소리와 함께 연극은 끝났다. 배우와 사진 찍고 인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아직 아버지날은 7시간이나 남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