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찾은 나
마음이 바빠진다.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 하고, 하고 싶은 일만 하기에도 인생이 짧은 시기에 와 있다. 건강상 이유로 일찌감치 접어놓았던 장시간 비행을 더 나이 들기 전에 도전해 본다. 시드니에서 직항으로 장장 14시간 걸려 도착한 밴쿠버, 게다가 돌아올 때는 한 시간이 더 걸렸음에랴.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여행 현지 시각에 맞춰 될수록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시차적응을 미리 시작했다. 멀미약까지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준비된 자의 여유랄까. 덕분에 별탈 없이 도착했고 낮과 밤 시간 적응도 빨라 예정에 없던 산행을 일정에 추가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4800km의 광활한 록키산맥을 일부나마 느껴보고자 용기를 냈다.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동화 속 마을 밴프는 여행객들로 가득하다. 겨울에 눈이 많은 지역 특성상 건물들은 대부분 뾰족한 지붕을 가졌고 아기자기한 집들은 산악 마을의 아름다운 정취를 더했다. 곤돌라를 타고 설퍼 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주위는 온통 길쭉한 침엽수로 뒤덮여 있다. 하늘과 맞닿을 듯 끝없이 펼쳐진 웅장한 산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함은 그 자리에 서 있는 내 몸 전체를 흡수해 자연과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오르락내리락하며 한참을 걷다가 숨이 가빠질 때쯤 해발 2285m 정상에서 바위 틈에 홀로 피어있는 노란 꽃 한 송이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매우 작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물음 하나를 내게 던진다. 내가 나로서 꽃피우는 것, 그래서 내가 가장 나다워 지는 것은 무엇이냐고.
그런 까닭으로, 관광여행 중임에도 나에게 진 마음의 빚 하나를 글로 풀어내기 위해 일부러 들른 곳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테베의 도서관 위에 ‘영혼의 치유장소’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고 해서였을까? 어딜 가든 몸과 마음이 쉬고 싶을 때 즐겨 머무는 곳이 되었다. 외관이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이곳 밴쿠버 공립 도서관은 입구에 들어서니 칠층까지 뻥 뚫린 공간 위로 지붕이 유리로 덮여있다. 탁 트인 공간에서 서점과 문구점, 카페를 마주하는 순간 쇼핑센터인가 했다. 지하로 한 층 내려가니 높은 천정은 어린이들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고 바닥에 엎드린 채 둘러싸인 책을 뽑아 읽거나 뒹굴면서 장난감을 갖고 노는 모습이 놀이방 같다. 한켠에서 선생님이 동화책을 읽어 주니 올망졸망 모여앉아 귀는 쫑긋, 눈망울은 초롱초롱하다.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는 모습 뒤로는 부모들이 함께 한다. 나도 어린 자녀들 위주로 문턱이 닳도록 다닐 때가 있었다. 구석구석 어딜 봐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어른들을 보며 그 여유로움이 딴 세상처럼 느껴져 ‘나두야’ 하는 부러움이 항시 있었다. 은퇴 후 하고 싶은 일 목록에 하나를 더 추가해 놓았었으니.
어느 층이 좋을까. 원형으로 돌돌 말려있는 건물을 한 층씩 둘러보다 창가에 자리잡고 앉으니 마치 펼쳐진 책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온통 창문 구조에 독특한 공간배치라 실내인데 실외 같은 착각이 든다. 이 유리벽은 자연 채광으로 실내에 밝은 빛을 선사하고 바깥 경치와 하늘을 감상하는 순간 마음까지 쉴 수 있다. 옆 책상엔 한 중년 남성이 신문을 보고 있다. 의식주가 다 들어있는 듯한 커다란 짐 꾸러미를 곁에 놓고서. 다른 매체가 많아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인쇄된 글로 읽는 그의 모습은 스텐리 공원 새벽 산책길, 호숫가 벤치에서 잠을 자고 있던 노숙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 밑에도 비슷한 보따리가 놓여있었다. 남루한 옷차림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은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 까닭이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내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쓰고 싶은 글의 제목이 떠올랐다. ‘도서관에서 찾은 나’. 적금이 만기된 기분이다. 이 목돈으로 무엇을 할까? 제일 관심 갖고 풀어야할 숙제를 주제로 삼는다.
그 제목을 안고 시드니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즐겨 다니는 도서관 안에는 운 좋게도 카페가 있다. 나에게 주는 선물로 커피 한 잔과 케잌 한 조각. 낮은 이층 건물이지만 밖의 풍경은 우거진 나무들과 그 뒤 배경으로 하늘이 드넓다. 비 오는 날은 더욱 분위기에 빠져들기 쉽다. 갈 때마다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약간의 소리를 내며 게임을 즐기는 네 명의 남자 노인들. 낱말 맞추기인가? 서로 대화하는 소리는 소곤소곤 하지만 나무조각 움직이는 소리는 막을 수가 없나보다. 내 아버지는 저런 게임도 즐길 줄 모르셨고 얼마 전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옆 테이블엔 항상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중년 남성이 있다. 젊은이처럼 책가방이 옆에 놓여있다. 늘 딸기 쉐이크를 시킨다. 내가 즐겨 앉는 자리가 있듯이 그 남자의 자리도 정해져있다. 그 옆 작은 방에서는 할머니들이 동그랗게 둘러 앉아 뜨개질을 한다. 정사각형 모양을 형형색색 떠서 모아 커다란 담요를 만들어 어려운 나라로 보낸단다. 칠팔십 년은 족히 살아냈을 그들은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나눌 얘기도 많다. 그 중 나이가 제일 많을 것 같은 분은 내 어머니를 닮았다. 손 따로 입 따로 얼마나 자유자재로 손놀림이 빠른지.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었던가. 몸이 동면에서 깨어났음을 알린다. 이제 장거리 여행에 대한 자신감이 살아났고 친정 부모님은 팔십 세가 다 되어서야 세계 여행을 멈췄던 기억에 희망이 샘솟는다. 다음 여행지는 탑승 시간을 조금 더 늘려 자연의 위대함이 있는 또 다른 곳, 나이아가라 폭포가 될 것 같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했으니 멀미약은 물론 소화제까지 챙겨야겠다. 조물주가 만든 자연을 감상하며 인간이 만들어 놓은 도서관에서 생각을 정리하려 함이니. 내가 나로서 꽃피우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은 꼭 하는 것이며, 그것을 글로 풀어내어 내 삶을 통찰하는 것이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바쁜 일상을 일시 정지시키고 집중 몰입할 수 있는 곳에서 이렇게 또 하나의 글이 탄생한다.
차수희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