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결
연초가 되면 한국에선 많은 사람들이 철학관 순례에 나선다. 운명을 믿지 않는 이들도 일년 신수를 점칠 겸 반은 재미 삼아 철학관이나 점술가를 찾는 것 같다. 나들이가 부담스러운 노년층에선 글과 삽화가 어우러진 당사주 책을 사보는 경우도 있고 젊은 층은 온라인 토정비결 등을 전전한다. 이런 현상은 조선 말기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정착된 세시풍속인데 일종의 사회심리학적 요소를 띄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토정비결>이 보급된 것은 19세기 말로 예로부터 국가적 환란이나 중대사를 앞두고 지배층이 점복술에 기대곤 했던 것이 점차 피지배층에게까지 확산된 결과이다. 구한말 왕조가 몰락해가던 시기에 힘겹게 살아가던 서민들은 토정비결을 들여다보며 위안과 희망을 얻었을 것이다.
지금도 정초에 거리에서 토정비결로 1년 신수를 점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총 144개로 이루어진 토정비결의 점괘는 정월부터 12월까지 4언 3구로 풀이하고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이 길조를 담고 있고 흉조는 불행을 극복할 대안을 제시한다. 다만 역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별로 없는 일반인들에게 토정비결의 시적인 풀이는 다소 오해를 부를 소지가 있다. 태어난 시를 제외하고 연월일만 괘에 맞추어 숫자로 분류하는 토정비결은 사주명리에 비해 내용이 두루뭉술한데다 개개인이 처한 구체적인 정황을 알아낼 수 없어 역술인들도 부수적으로 참고만 할 뿐 사주풀이에 기반해서 상담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비결서가 주역의 음양설에서 기인했을 뿐 아니라 역술인들에겐 일종의 사유의 지침으로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필자는 크게 점수를 주고 있다. 문학적인 표현 뒤에 숨겨진 진의를 파악하고 그 핵심을 내담자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을 때 역술인의 통찰력은 극에 달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지인 중 매년 토정비결을 들여다보며 고민하는 여성이 있다. 필자가 이십대 중반 즈음 한국에서 명리학을 사사하던 시기에 알았던 사람으로 헤어진 지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필자와 교분을 나누고 있다. 그녀는 토정비결 마니아이다. 유독 이 책에 집착하게 된 것은 자신이 태어난 시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란다. 역술가들로부터 정확한 상담을 받기 어려웠던지라 언젠가부터 혼자 토정비결을 연구하는데 재미를 붙였다고 한다. 가끔 전화로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묻는데 필자가 아는 한 한국에서 알아주는 대학의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던 그녀는 이미 이십대 초반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부모님은 무제한 별거에 들어간 데다 자신은 훌륭한 대학 간판과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취직이 되지 않았다. 결혼을 통해 탈출구를 찾고자 했으나 오히려 만나던 남자와 헤어지고 이유 없이 건강도 나빠지는 등 한마디로 되는 일이 없었다.
자포자기 하던 차에 우연히 만난 역술가로부터 선생이 되면 그나마 밥은 먹고 살 수 있다는 조언을 들었단다. 하여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것이 영어 개인지도인데 마흔을 넘기고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걸 보면 그 역술가가 제대로 길잡이를 해준 셈이다. 토정비결에 대한 그녀와의 대화는 2013년 계사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의 괘는 <事多慌忙 晝出邙凉 사다황망 주출망량>이었다. 해석하자면 ‘일에 황망함이 많으니 대낮에 도깨비가 나타난 것과 같다’가 되겠다. 그리고 나머지 괘는 ‘바람이 외로운 등에 스치니 불이 꺼지고 밝지 못하다. 일월(해와 달)이 밝지 못하니 동서를 분별치 못하고 달이 차면 이지러지고 그릇이 차면 넘치리라’였다. 흉조였다.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는 그녀에게 필자는 ‘대낮의 도깨비’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본래 도깨비란 으슥한 밤에 사람을 홀리거나 골탕 먹이기도 하지만 그 본 모습은 아무런 실체가 없는 허구인 것이다.
더구나 대낮의 도깨비라면 일종의 꿈이나 허상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더니 그녀는 뭔가 짚이는 데가 있는 듯 했다. 혹여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이가 있거나 갑작스런 제안이 들어오면 신중히 결정하되 일이 잘못 되어도 그다지 큰 피해는 입지 않을 것이라 필자는 말해 주었다. 도깨비가 심술궂긴 하지만 다소 어리석고 우스꽝스럽다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겪을 일이 도깨비에 관련된 민담처럼 해학적인 면도 있을 터이니 불쾌하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달 후 그녀는 저간의 사정을 내게 알려왔다. 필자와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던 것은 사실 그녀가 어떤 영어학원의 원장으로부터 괜찮은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직후였는데 흔치 않은 기회인지라 토정비결의 충고를 무시하고 싶었단다. 자기의 운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앞뒤 잴 것 없이 출강하게 되었는데 원장이 매사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어지간히 맘고생을 했다고 한다. 결국 한 달 만에 허망하게 그만두었다며 투덜거렸다. 그 과정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가 쓰라린 듯했다.
“하지만 악당은 아니었을 듯한데요? 좀 싱거운 구석이 있지 않던가요?” 하고 필자가 묻자 별안간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원장은 머리가 비상하고 학원 사업을 벌여 상당한 부를 이룬 듯한데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하고 말았다. 급한 마음에 무리한 대우를 약속했는데 막상 일이 성사되자 본전 생각이 났던가 보다. 여자에게 커피 한 잔도 못 사는 유명한 구두쇠인지라 체면 불구하고 자신의 말을 번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녀가 미련 없이 일을 그만둬 버리자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특별히 개인 지도가 필요한 학생 몇 명을 따로 소개시켜 주더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 후로도 간간히 전화를 하여 기죽은 목소리로 그녀의 안부를 묻는가 하면 잊을만 하면 학생을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그의 애매한 태도에 헷갈린 그녀는 한 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대충 그와 화해하고 이젠 그를 도깨비라 부른다고 한다. 필자도 그만 웃고 말았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바람이 외로운 등에 스치니 불이 꺼지고 밝지 못하다’는 말은 학원에 출강하는 일이 별로 순탄치 않음을 예견하는 듯하고 ‘일월이 밝지 못하니 동서를 분별치 못하고 달이 차면 이지러지고 그릇이 차면 넘치리라’는 말은 혼돈 속에서도 자중자애 하라는 뜻으로 풀이하면 무방할 것 같다. 도깨비란 처음엔 사람을 좀 힘들게 하긴 해도 나중엔 은혜를 갚겠다고 설치기도 하고 제 풀에 지쳐 달아나기도 하는 등 상당히 변화무쌍한 존재이니 괘의 의미는 이처럼 심오하리만치 함축적이다. 필자가 좀 우스운 사례를 들긴 했지만 본시 토정비결은 음양오행의 원리에 기초한 수많은 중국의 점술서들이 합쳐져 탄생한 것이므로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듯한 시구들 안에 나름대로 질서정연한 법칙이 있고 그 의미를 곱씹어 보면 확연한 답이 나온다. 이를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고문의 해석에 친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엉뚱한 상상을 할 수 있으며 역술가들도 그 참 의미를 오해할 만하다.
그녀의 향후 몇 년치 괘를 미리 뽑아 보았더니 2018년엔 <玉兎昇東 淸光可吸 옥토승동 청광가흡>이라 옥토끼가 동쪽에 오르니 맑은 빛을 가히 마신다는 뜻의 최고 길조가 나왔다. 혹여 그녀가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뭐라고 말해줘야 좋을지 또 한참 궁리해 보아야 하니 이래저래 명리사는 늘 피곤한 법이다.
현 김태련 한의원 원장,
태을명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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