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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칼럼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 광장’

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 광장’

[차루나]

애들레이드 여행 중에서

 

시내를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단잠에서 깨어보니 어슴푸레 한 버스 창밖은 온통 포도밭으로 이어지고 있다. 봄 마중이라도 가려는 것일까. 이른 새벽부터 부산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는, 이제 막 눈이 트인 연녹색의 잎들이 앙증스럽다. 몇 년 전, 연말 휴가를 이용하여 이곳에 들린 적이 있었다. 유럽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빅토리아 주의 멜버른을 지나 바다를 끼고 있는 Great Ocean Road에 다다랐다. 바위들이 물 가운데 우뚝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며 반나절쯤 달려 내륙으로 들어섰다. 한여름의 눈부신 햇살이 진녹색의 잎 위에서 반사되고 있던 포도밭은 남호주 애들레이드 초입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아 괜스레 흥분되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부둣가는 관광버스들이 내려놓은 부스스한 승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미 만선인 배에 오르니 갑자기 어지럼증이 인다. 또 멀미하려는 걸까. 얼마 전 유람선 여행 때의 일이 떠올라 덜컹 겁이 났다.

성탄 장식으로 화려함을 더하는 선박 안은 시설이 잘 되어있는 어느 지역을 옮겨 놓은 듯했지만 나는 전혀 흥미롭지가 않아 일행에서 곧잘 벗어나곤 했다. 다행히 농촌에서 온 모녀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어느 곳이나 농촌 생활이 별다를 것이 있겠느냐마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학창 시절 호주의 목장과 양계장 등을 슬라이드로 보았던 기억이 떠올라 사뭇 즐거웠다. 오늘은 색다른 화두로 시작되었다. 새벽 2시 어떤 남자가 바다로 몸을 날렸다. 잠 못 이루어 선창에 나와 있던 노부부의 신고로 곧바로 배는 항해를 멈추었다. 두 아들과 여행 온 가장이 아내와 다투었다고도 하고 취기가 있었다는 말들이 돌아다녔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작은 보트와 헬리콥터가 쉴 새 없이 주위를 맴돌고 있던 몇 시간, 승객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들의 시간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갑자기 빠른 속도로 배가 움직였다. 예정된 도착시각을 차질 없이 맞추느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멀미를 대비하여 약과 귀에 붙이는 것을 사는 등 부산을 떠는 남편을 엄청 비웃었는데..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 고역에 시달리던 몇 날, 잘난 체하며 까불거리던 것에 대한 벌을 톡톡히 받는 것만 같았다.

 

캥거루 섬에 대한 운전기사의 안내가 있었지만 내 생각엔 그가 말한 섬의 크기보다 몇 배나 더 넓을 것 같다. 나지막한 담처럼 막힌 유칼립스 사이를 마구 달리는 것이 어떤 미로에서 헤매는 듯했다.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어지럼증에 지루하고 답답함이 더했지만, 드문드문 숲이 끊기는 곳이 있어 크게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지천으로 핀 유채꽃의 아름다움에 작은 함성이 터지기도 하고 처음 보는 새들과 식물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앞에 앉은 수더분한 호주 아줌마의 어깨를 건드려 본다. 트이는가 하면 또 막히는 유칼립스 나무 사이를 헤집듯이 달리기를 반복하는 것이 내가 살아온 날들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인다. 지나온 세월 속에 사방이 꽉 막혀 암담하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틈이 보이는가 하면 상상치도 못하던 일들로 다시 막혀버린 적은 또 얼마나 되었을까. 나의 게으름과 선입관 그리고 낮은 자존감 때문에 트인 공간을 나 스스로 막아버린 적 또한 셀 수 없을 것이다. 흘러간 시간 따라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막힌 벽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일. 나의 역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던 일들의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듯 가슴 한 켠이 씁쓸하여 얼른 유칼립스 숲을 벗어나고 싶었다.

Seal Bay Conservation Park 물개 서식장. 햇빛에 눈부신 바다냄새가 왈칵 몰려온다. 황소만큼이나 몸집이 큰 물개들이 쌍쌍이 여기저기서 뚱뚱한 배를 씰룩거리며 낮잠을 즐기고 있다.

양쪽 모래사장에 퍼져있던 모래더미들이 모두 물개라는 것에 실로 놀라웠다. 관광객들이 모래사장으로 내려서니 몇몇이 다가와 재롱을 피우기도 하고 멀거니 사람 구경을 한다. 물 밑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은 커다란 물개가 바다 속으로 첨벙 뛰어드니 분수처럼 솟구치는 물줄기가 시원하다 못해 얼음물처럼 차가운 느낌으로 내게 다가온다.

점심시간 러시아에서 온 부부와 동석하여 여행담을 나누었다. 호주는 처음이지만 이곳 캥거루 섬에서만 머물다 간다고 했다.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으니 비행기 삯을 운운하며 다른 곳에도 눈을 돌릴 수 있으련만 다른 양상의 여행자를 보며 우리의 여행스케줄에 대해 잠깐 생각을 해 보았다. 높다란 등대가 서 있는 History & Heritage에 다다른다. 시드니 근교의 끝없이 펼쳐진 허허바다는 아니지만, 바다는 어느 곳이나 제 나름의 색을 뿜어내고 있다. 마지막 코스인 야생공원, 키다리 나무 위에서 그네 타는 코알라들을 뒤로하고 비바람이 불어대는 숲속으로 들어선다.

 

선착장을 벗어나 버스 의자 깊숙이 몸을 맡기니 긴장이 풀리는지 잠이 쏟아진다. 이번 여행은 분주했던 일상에서 벗어나는 방편이었다. 전에 없이 한동안 풀타임으로 근무하다 보니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높아갔다. 별다른 기대와 계획도 없이 무조건 지인들을 따라나섰지만, 호텔로 돌아가면 다시 안내지를 꼼꼼히 살펴보아야겠다. 애들레이드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즐겁고 유익한 여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 솟구친다.

미로 같지 않은, 사방이 트인 길을 따라 여유롭게∙∙∙

 

차루나 / 수필가, 시드니 한인작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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