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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칼럼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 광장’

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 광장’

[박조향]

아름다운 에너지

 

지난해 연말 모임에 참석했던 두 남자의 모습이 요즘 문득문득 떠오른다. 말이 없고 신중하지만 색깔이 뚜렷한 그들이 나에게 깊은 사색을 하게 만든다. 여러 해 동안 받은 감동의 순간들이 내 안에서 출렁거리며 넘쳐 나오려고 한다.

 

보통 자녀가 의사인 경우 주위 사람들을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게 만드는데 그들은 한 번도 자식 자랑을 한 적이 없다. 흔히들 유럽여행을 가기 전부터 요란하게 광고하고 여행 중 수시로 동영상까지 보내며 소란스러운데 그들은 조용히 다녀오곤 한다.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몸이 불편하여 여행은 꿈도 못 꾸는 주위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져 존경스러웠다.

흙을 사랑하여 손수 재배한 채소를 공들여 차곡차곡 따서 나누어 주는 그 손길이 고맙고 아름답다. 게다가 그들이 결혼해서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아내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평생 옥신각신 싸우며 살아온 나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충격이 에너지가 되어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수술 날짜가 잡혀 심란한 상황인데 오래간만에 꿈틀거리는 의욕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1960년대를 한 울타리에서 꿈을 키웠던 우리들은 선후배가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화목한 모임이다. 그새 정이 듬뿍 들어 이젠 나도 기다려지는 열성 회원이 되었다. 마침내 완성된 그림을 싸 들고 모임 장소로 갔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나 홀로 비밀스럽게 기획하고 준비한 깜짝 이벤트의 내용을 간사에게 살짝 귀띔했다. 노련하고 지혜로운 간사가 혹시 이 중에 결혼해서 사는 동안 아내에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저기서 궁시렁 궁시렁. 한 개구쟁이 동문이 슬쩍 손들었다가 아내의 핀잔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자 동문은 자격 없으니 손들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평범한 남편들은 화 안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우겨댄다. 물 만난 아내들은 걸핏하면 화 잘 내는 남편도 참고 여지껏 살아준 우리에게 상 줘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제일 화 많이 낸 내 남편은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들어댄다.

“자랑스런 모교, 존경하는 동문 그리고 정다운 서육모 신사 숙녀들 틈에서 넘치는 행복을 누리고 있어 감사합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는 복 많은 아내의 증언은 충격이었습니다. 나를 감동시킨 훌륭한 남편들에게 너무 감사해서 치하드리고 싶어졌지요. 부족한 소품이지만 정성을 담은 선물이니 받아 주세요. 덕분에 정말 오래간만에 붓을 들고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상자는 최0, 김00 동문입니다.”

당첨된 동문은 몹시 수줍어하면서 앞으로 절대로 화낼 수 없게 되었다고 쑥스러워한다. 치밀하지 못한 주최 측의 실수로 오늘 파악된 제3의 후보는 총동창회 송년 모임 때 해결하기로 하고 한바탕 즐거운 잔치는 끝이 났다.

 

총동창회 송년의 밤에 서육모에서 도네이션을 잘하는 동문이 ‘화내지 않는 좋은 남편’ 상으로 내 그림을 받고 “앞으로도 화내지 않고 잘 살겠습니다. 선배님.” 하면서 금일봉을 쥐어 주었다. 화들짝 놀래 얼떨결에 끌어안았다. 나도 오래간만에 도네이션을 할 수 있어 기뻤다. 만성질환에 시달려 우울증에 걸릴까봐 신경 쓰는 자녀들에게 시상식 장면을 보내주었더니 반응이 재미있다. 둘째 며느리는 ‘와아∼ 그런 분은 정말 상 받을 만하네요’ 부러워하고, 그 옆에서 뻘줌해 하는 화 잘 내는 내 아들 모습이 떠오른다. 착하다고 소문난 남편과 사는 내 딸은 ‘그런 사람이 있긴 하네’라며 신기하다고 한다. 엄마가 이런 분들과 어울려 재미나게 지내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렵사리 최근에 서육모에 참석하게 된 제부 윤선배가 화내지 않는 신사인 줄은 알고 있지만, 동생과 조카들에게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 만만찮은 이민 생활이 사람을 변질시키기도 하니까.

다음 후보자가 생겼으니 부지런히 걸 맞는 그림을 그려야겠다. 나의 뮤즈들을 위하여.

박조향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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