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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문학협회 ‘산문 광장’- 향기로운 우정

[권영규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향기로운 우정

사무치게 그리운 이가 있는 사람이 부럽다’. 어느 모임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한 그의 얼굴에선 쓸쓸한 느낌이 들어 내 눈엔 마치 마른 꽃처럼 보였다. 나이 때문으로 미루기엔 아직 이른 그가 왜 이처럼 보였을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 내외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호주로 이민 와서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참으로 부지런하게 살아왔다. 그 동안 내게 생존 외의 어떤 그리움에 젖어 본다는 건 호사였을 지도 모른다. 젊음이 다 지나가 버리고 이제 삶의 여유가 찾아왔다 싶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가려 마음을 다졌다. 인생에는 나이에 따라 그에 맞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열려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따뜻한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족이 동경에서 살고 있을 때 천사처럼 내게 다가 선 바다건너 서양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리안느. 제네바 공무원인 그녀는 건축학을 공부하던 대학생 시절 방학 때마다 꽃꽂이를 배우기 위해 일본을 찾아 온 열정이 넘치는 여성이었다. 지인의 부탁으로 그녀가 일본체류 기간 동안 우리 집에서 함께 기거하곤 했는데 직장에 다니느라 바빴던 나를 많이 도와 주기도 했던 고마운 친구다.

2년 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에 나는 이 친구를 만나기 위해 파리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프랑스 남동부의 한적한 시골 역에 도착했다. 역사를 벗어나자 후끈 달아오른 아스팔트 열기가 얼굴에 훅 끼쳐왔다. 시골 마을답게 거리는 마치 무인도처럼 고즈넉하니 땡볕만 가득했다. 두리번거리는 내 시야에 한 여인이 부리나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리안느였다. 나도 그녀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우린 서로 얼싸안았다. 연신 내 볼에 뜨거운 입맞춤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머리에 새치가 생겼을 뿐, 20대 젊었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 역시 내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연신 나를 관찰하듯 내려보며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실로 삼십 년만의 해후였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서로를 봐서인지 얼굴의 주름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은 듯싶었다. 열흘 간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우리들은 그 동안의 회포를 끊임 없이 풀어댔다.

아리안느의 집은 구석구석 그녀다운 따뜻한 마음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그녀는 네팔에서 두 남매를 입양해 키우고 있었는데 아기 때부터 입양 온 아들은 이제 15살, 딸은 10살로 아이들 이름을 네팔 식으로 지었다 한다. 집안 여기저기에서 네팔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휘장이며 그림과 장식들이 눈에 뜨였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네팔 아이들을 키우며 그들이 태어난 나라를 가까이 생각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 퍽 감동적이었다. 삼십 년 전 내가 딸을 출산했을 때에도 이 친구는 보드랍고 포근한 실로 아기포대기와 앙징스런 모자까지 손수 떠서 보내주었다. 나는 그것을 아직까지 잘 보관하고 있다. 딸이 결혼하게 되면 손녀에게 대물림 하리란 생각에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아들이 세 살 때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그림처럼 크게 프린트해서 골판지에 1984년도 달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년도와 상관 없이 그 달력을 마치 명화라도 되는 양 감상하며 오래도록 벽에 걸어두었었다. 아리안느는 어른이든 아이든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따뜻한 친구여서 무척 자랑스럽다.

지금도 가끔 느닷없이 이 친구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열흘 동안 체류했던 그녀와 그 집의 향내에 취하게 되고, 아리안느와 그녀가 살고 있는 스위스가 그립다. 거실에서 아득히 보이던 그 유명한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이며, 그녀와 기차를 타고 체르마트라는 산악마을까지 가서 다시 산악열차로 마테호른 산이 코 앞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까지 갔던 일. 그 거대한 산을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꿀맛처럼 먹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 산에서 뿜어내는 정기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결코 마른 꽃이 되지 않으리라. 서로 풍란(風蘭)처럼 향기로운 사이로 지낼 친구를 만나며 여생을 보내리란 꿈을 꾸어 본다.

권영규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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