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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문학협회 산문광장

[사진: Bathurst Gardener's Club 홈페이지) ]

초록을 눈에 담다

시월초가 되면 나를 부르는 곳이 있다. 루라 정원 축제(Leura Gardens Festival). 다양한 봄꽃들을 만끽하러간다. 루라 기차역 앞길에 줄지어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가 꽃잎들을 함박눈처럼 흩뿌리며 방문객들을 반긴다. 그 연분홍색을 시작으로 내 머리 속 크레파스 상자가 열리기 시작한다.
블루마운틴 해발 985미터 고지대에 위치한 이 마을은 여러 가정집에서 잘 손질된 정원을 일반에게 공개한다. 시드니에 비해 사계절 변화가 비교적 뚜렷하므로 좀 더 많은 색들을 자연에서 접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 올해도 같은 집을 다시 방문했는데 방학이면 시골 할머니 댁을 다니러 갔던 때처럼 역시 집주인 할아버지가 반겨준다. 칠십년대 초 땅 구입을 시작으로 마무리 작업까지 자세한 과정을 설명해 주는 설레임 섞인 그의 모습은 매년 보아도 신선하다. 반세기 동안의 삶을 말하는 내내 뿌듯해 하는 노인의 여유로움에서, 나는 내 삶에서 결산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자문해본다. 정성스레 가꾼 꽃나무들을 같이 감상하면서 ‘식물은 겨울에 죽은 듯해도 봄이 되면 새싹을 보이며 다시 살아나는데 인간은 그러지 못 한다’라며 나무가 부러울 때가 있다한다. 내년에 또 만나자는 내 인사에 이번엔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하는 노부부를 뒤로 하고, 5헥타르가 넘는 에버글레이즈(Everglades) 가든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거대한 정원에는 온 세상 식물이 다 있는 것처럼 다양하다. 무릎 높이의 노랑, 하양, 보라 등의 꽃들로 가득한 꽃마당에 흠뻑 빠져 걷다가 쉴 곳을 발견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가의 평상에 누워 올려 다 본 곳은 또 다른 세상이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아름드리 덩치에 온통 연초록 이파리들을 달고 있으니 야들야들한 부드러움이 어색할 지경이다. 새파란 하늘이 사이사이 뒷배경을 이루고 햇볕에 속이 보일정도의 투명함에 빠져들다가 어느 새 스르르 눈이 감겨온다.

내가 다니던 학교 마당에도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다. 겨울을 이겨낸 연두색 이파리들은 중학 입학의 설레임과 새 학년 시작 때마다의 각오를 희망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한 여름이 되면 뙤약볕에 짙은 초록으로 녹음져 사춘기 고민을 친구와 나누며 쉬어갈 그늘을 제공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볼 때쯤에는 시집을 서로 돌려보며 감상에 젖곤 했다. 감추어진 초록이 안으로 숨을 고르는 겨울엔 앙상한 가지 위로 얹힌 무거운 흰 눈의 무게를 이겨내며 인내를 가르쳐주었고 머지않은 봄을 기다릴 줄 알게 했다. 사계절 변화를 여섯 번이나 지켜보았으니 그 생동감이 철없던 청소년기의 희로애락을 잘 다스리게 도와주는 동반자였던 셈이다. 늠름한 그 나무와 함께 보냈던 학창시절이 추억의 한 장면으로 휙 지나가고, 나이 든 내가 또 다른 느티나무 아래 누워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에는 호주 토종 나무 유칼립투스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낙엽, 나목의 단계를 생략해서인지 일 년 내내 달려있는 이파리들은 빛바랜 회녹색이다. 취생몽사(醉生夢死-아무 의미 없이 한평생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감)를 떠올리게 하고 그저 살고 있기만 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살아있지만 죽은 자처럼. 내 노년의 삶이 자칫 이렇게 될까봐 열심히 연초록을 눈에 담는다. 일년 치 희망을 저축해 놓고 내년까지 꺼내 쓰려고 충분히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머릿속에 저장한다. 올해는 크레파스 색깔 중 연초록이 내가 살아있음을 일깨워준다.

 

차수희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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