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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산문 정기 기고>

[박조향 ]

동화나라의 예쁜 잔치

출판기념 회장에 들어서니 빨강 베레모를 쓴 작가가 열심히 책에 사인을 해주고 있다. 마치 아이돌 팬 미팅이 연상되는 줄이 제법 길어 보여서 인내심 없는 내가 물러서다가 작가의 남편과 딱 마주쳤다. 빨강 보타이에 빨강 양말을 신은 신사를 향해 놀랍고 반가운 탄성이 절로 터져나왔다. ‘이렇게 입으라고 해서…’ 내 표정을 알아차린 그가 멋쩍은 듯 웃었다. ‘아니 멋지게 잘 어울려요’ 하고 나는 엄지까지 쳐들어 보이며 응원을 해주었다.

순서지에 보니 오늘의 행사를 좌지우지할 사회자가 바로 정 변호사다. 그의 직함이 변호사지만, 오래 전부터 교포신문에 게재한 글 솜씨로 인지도가 넓은 분이기도 하다. 듬직한 인상에 예의 바른 인사말에 박수소리가 요란하다.

둥근 테이블에 어린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얼 만들고 쓰느라 제각기 몰두해 있는 광경이 여느 출판기념식에서도 본 일이 없어 퍽 신선하게 다가왔다. 역시 동화작가다운 안목과 발상이 돋보였다. 그들 중 두 어린이의 자작시 낭독은 어른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그리고 작가의 큰 아들이 전한 인사말은 젊은이답게 간결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다음으로 마이크를 이어받은 은퇴교수이자 오늘의 주인공인 부군께서는 극구 마이크를 사양하며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고 그저 운전만 했다 고 겸손해 했지만, 노신사의 체면에 빨강양말을 신어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도움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다음으로 마이크를 받은 이는 둘째 며느리였다. 그녀의 구연동화 기술은 가히 어른들도 빨려 들게 했다. ‘아니 벌거벗은 임금님이 이렇게 재미 있는 동화였던가요?’ 구연동화가 끝나자 사회자의 너스레에 모두가 ‘그러게 말이에요’ 하고 공감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오늘 잔치의 하이라이트는 검정색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고 또 검정색 드레스코드로 단장한, 마치 동화나라 요정들처럼 연출된 가족 합창단이었다. 앙증스런 우크레나 반주에 맞춰 흥겹게 부른 노래의 가사가 호주의 일상을 유쾌하게 표현해서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더 감동적인 것은 며느리가 작사 작곡한 것이라니 여기저기서 칭찬이 자자했다.

코카투 요란한 소리에 번쩍 잠에서 깨어 하품을 찍 하고 기지개를 펴

창문 열면 풍겨오는 유칼리 나무냄새 나를 반기네

몽롱한 아침에 부드러운 풀랫 화이트

내 입에 감기는 보들보들 야들야들 스크램블

오늘도 달콤한 하루가 될 것 같아 (하와유 ~)

선글라스 치켜 올리며 코카투 서로 인사해 (구다이 ~)

2절은 모두 흥얼흥얼 따라서 부를 수 있어 장내는 흥겹고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싸늘한 핵가족 시대에 마치 개구리 가족처럼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합창하는 모습이 눈물겹게 아름답고 한편 부럽기도 했다. 온 가족이 하나 되어 만들어낸 어여쁜 이 잔치가 함께한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더불어 참 많은 생각과 의미를 안겨주었다. 뷔페 식 접심 식사가 끝나고 상품권 추첨이 진행되었다. 호명된 사람마다 로또라도 당첨된 양 몹시 좋아라 한다. 가지각색의 소품들이 한국의 인사동을 뒤지고 다니며 준비한 듯 정성이 느껴져서 은근히 샘이 날 정도다.

마지막으로 호명된 어린이가 와인 한 병을 치켜들고 함박웃음을 지어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어린 시절 운동회 날 커다란 청군, 백군 종이풍선이 터지는 휘나레 장면이 떠올랐나 보다. 모두들 체면을 걷어내고 목청껏 소리질러댔으니.

폐회 직전 사회자가 각자 앉았던 의자 등받이를 잘 살펴보라고 한다. 보물찾기 하듯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딱지가 붙어있는 의자에 앉았던 사람이 그 테이블에 장식해 놓았던 예쁜 꽃병을 들고 가라고 한다.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빨강양말 신은 꽃병을 높이 쳐들었다. 깜짝 횡재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또 어디서 튀어 나오려나 궁금해서 두리번거려본다.

오늘 행사에서 이처럼 귀여운 발상들은 모두가 순수한 동심이 아니면 감히 상상 조차할 수 없는 예쁜 마음이 모인 정성일 게다. 내 마음도 덩달아 풍선처럼 부풀어 행사 내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으니.

헤어질 때는 또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었다. 투명 스마일 봉투 속에는 손수 구운 예쁜 쿠키 두 개가 웃고 있다. 옛날 옛적에 잔칫집에서 가면 실컷 잘 먹고 갈 때 또 전이랑 떡이랑 잔뜩 싸주던 따뜻한 정이 되살아나서 뭉클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쁨과 감동을 안겨주는 작가의 속 깊은 정을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오늘 동화나라의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역시 사랑스런 미소가 가득 피어 있는 걸 보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차창에 보이는 즐비한 집들과 벌판과 나무들과 차량들의 행렬들이 오늘따라 낯설어 보인다. 문득 박목월 님의 시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울리는 세상’이라는 시 구절이 떠오른다. 그렇다. 여기는 동화의 세상이 아닌,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한껏 풀어졌던 마음을 바짝 당겨본다.

박조향 / 수필가 (시드니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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