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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스마니아의 ‘James Austin Cotage’, 역사 관광지 추진

[영국에서 죄수로 유배돼 타스마니아에서 형기를 마친 후, 지금의 호바트 북부, 더웬트 강(River Derwent) 언덕에 정착한 제임스 오스틴이 직접 지은 코티지(James Austin Cottage). 최근 지역 사학자이자 예술가인 루이스 켐슬리(Louise Kemsley. 오른쪽)와 예술가 케이 그린(Kaye Green. 왼쪽)씨가 이 건물의 관리를 맡아 새롭게 단장한다는 소식이다. ]

죄수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지역 사학자-예술가, 코티지 관리 맡아

18세기 영국의 죄수 유배지로 백인들이 시드니 코브(Sydney Cove)에 첫 죄수 선박(First Fleet)이 들어온 이후 이어진 죄수 수용은 시드니뿐 아니라 호주 전역 곳곳에 수용됐다. 19세기 초반, 백인들의 정착이 시작된 타스마니아(Tasmania) 또한 당시 죄수들의 흔적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호바트(Hobart) 시 북부, 더웬트 강(River Derwent) 언덕에 자리한 ‘오스틴 페리’(Austins Ferry)는 1809년 풀려난 죄수 제임스 오스틴(James Austin)이 이곳에서 시작한 페리(ferry) 서비스에서 이름을 딴 곳이다.

제임스 오스틴은 영국 서머셋(Somerset), 볼튼스보로(Baltonsborough) 출신이다. 이곳 농장 노동자였던 그는 아버지 존 오스틴(John Austin)과 함께 꿀벌 벌통과 꿀을 훔친 혐의로 유죄가 확정, 7년의 유배형을 받아 당시 호주로 이송된 사람이었다.

1803년, 영국 왕실 해군의 ‘HMS Calcutta’ 호에 실려 지금의 멜번(Melbourne) 남부 포트 필립(Port Phillip)에 도착한 그는 이듬해 ‘반 디멘스 랜드’(Van Diemen’s Land)로 이송됐다. 반 디멘스 랜드는 당시 영국인들이 타스마니아 섬을 지칭하던 이름으로, 이 섬이 ‘타스마니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856년이다.

1809년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그는 더웬트 강 서쪽에 12헥타르의 땅을 부여받았고, 거기에 자신이 거주할 작고 단순한 형태의 코티지(cottage)를 지었다. 이곳에 농장을 개척하고 살아가던 그는 1816년 사촌인 제임스 얼(James Earl)과 함께 더웬트 강을 건너는 페리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페리는 1883년 브릿지워터 다리(Bridgewater Bridge)가 완성될 때까지 강 운송의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페리 사업과 함께 그는 농장과 과수원, 더웬트 강을 건너는 이들을 위한 숙소를 운영하기도 하는 등 ‘죄수 신분으로, 성공한 인물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 ‘오스틴 페리’라는 지명을 가진 타운에는 그가 지어 거주했던 코티지(James Austin cottage. 12-16 Austins Ferry Rd, Austins Ferry TAS)가 남아 있으며, 이 유산은 오스틴 페리 타운이 속한 글렌오치(Glenorchy) 카운슬이 관리하고 있다.

최근 타스마니아의 신예 역사학자인 루이스 켐슬리(Louise Kemsley)와 예술가인 케이 그린(Kaye Green)씨가 이 건물의 관리를 맡아 새롭게 단장한다는 소식이다.

켐슬리씨는 “오래된 건축물을 좋아하는데, 오스틴 코티지를 보고는 한 눈에 반했다”면서 “지역 공동체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호바트 북부의 관광 명소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녀는 역사학자답게 제임스 오스틴이라는 죄수의 역사를 들려주는 역사 관광지 코티지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켐슬리씨는 오스틴에 대해 “그는 문맹이었지만 수완이 좋은 사업가였다”며 “형을 마치고 이곳에서 땅을 부여받았을 때, 그는 강을 건너야 할 필요성과 요구가 많을 것임을 예상했다”고 설명했다.

오스틴은 더웬트 강 페리를 시작하면서 사업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더웬트 강 건너편, 올드비치(Old Beach)로 가는 페리 사업을 시작한 이후 북부 론세스톤(Launceston)과의 무역 활동은 더욱 늘어났다.

1818년, 그는 당국으로부터 페리 서비스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독점이었던 그의 페리 운송 사업은 큰 수익을 안겨 주었으며, 그는 더 큰 농장을 만들어 과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길렀다.

오스틴과 사촌 얼은 또한 페리 승객을 위한 대형 숙박업소를 운영했으며, 이곳은 당시 호바트 타운을 방문하는 이들의 휴가지가 됐다.

오스틴이 더웬트 강변에서 일궈낸 비즈니스는 당시 식민지 총독이었던 라클란 매콰리(Lachlan Macquarie)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매콰리 총독은 이곳에 ‘로즈니스’(Roseneath)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던 오스틴은 1831년 사망했다. 그는 사망 전 모든 재산을 조카에게 남겼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든 사업체는 보다 큰 숙박업소 ‘Roseneath House’였다.

이 숙박업소는 그의 사후 90여 년간 운영되다가 1920년대 파산했고, 건물은 1967년 이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파괴됐다. 또한 그가 처음 시작한 더웬트 페리는 1950년대까지 운영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스틴이 더웬트 강 페리 이용자를 위해 지은 숙박업소 ‘Roseneath Inn’의 1920년대 모습. 이 숙소는 이즈음 파산했으며, 1967년 발생한 산불로 소실됐다.

상공에서 내려다 본 오스틴 페리(Austins Ferry) 풍경. 유배를 마친 후 이곳에 땅을 하사받은 오스틴은 자신이 거주할 작은 코티지를 지었고, 더웬트 강을 건너는 페리 사업을 시작, 성공했다.

제임스 오스틴이 마지막으로 펼친 사업은 보다 큰 숙박업소 ‘Roseneath House’였다. 이 숙박업소는 1831년, 그가 사망하기 직전 완공됐다. 사진은 1860년대 촬영된 ‘Roseneath House’.

‘James Austin cottage’의 1970년대 모습.

1967년, 이 지역에서 발생된 산불에 소실되기 전의 ‘Roseneath House’. 1960년대 촬영된 것이다.

김지환 기자 jhkim@koreanherald.co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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