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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칼럼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 광장’

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 광장’

[김 마리아]

내리막 길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 곳에서 넘어졌다. 한적한 산 고개를 나란히 걷고 있던 Y는 갑자기 다리에 힘을 주고 반동을 이용하여 뛰었다. 아래 평지까지 쉽게 내려갈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만 믿고 뛰어내려 온 것이 몸은 따라주지 못했다. 얼굴과 손이 먼저 땅에 착지를 하는 순간 온 얼굴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꼬꾸라졌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벌어진 일이라 동행하던 일행과 Y 자신도 놀랐다. 잠깐의 엇박자로 자신 앞에 일어난 상황에 얼마나 자괴감을 느꼈을까 생각하니 남의 일이 아니었다. 상대의 모습에서 나 자신이 투영된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시드니의 산은 대부분 밋밋하여 내려갔다 올라오는 등산로가 많다. 산을 좋아하는 나는 산을 오를 때 처음에는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걸음을 옮긴다. 차츰 계곡으로 내려갈수록 어둡고 숲이 우거진 산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는 걸 알게 된다. 오히려 높은 산꼭대기에서는 훤히 앞이 트여 소리라도 지르고 산에 온 기분을 마음껏 만끽한다. 가끔씩 호주의 상징인 산속의 작은 캥거루가 되어 다시 산을 올라가야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가 보인다. 자연이 그대로 잘 보존된 산허리에서 여러 가지 이름모를 새 소리와 동물들도 동행한다. 손가락 한마디보다 작아 보이는 새의 음악 잔치는 산을 하나 뒤집을 듯 크고 아름답다. 때로는 캥거루가 갑자기 나타나 심장을 멎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연 속에 살아가는 내 모습은 여기가 익숙해졌다는 걸 알게 해준다. 한국에서의 산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등산로의 출발점에서 숨이 차고 땀을 흘려야 정상의 목표지점에 도착할 수 있다. 땀 흘린 보람을 마음껏 느끼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이 내 것인 양 뿌듯하다. 산과 산이 서로 마주하며 가깝게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혼이 이미 산을 닮아 사람과 사람도 가깝게 붙어다녀야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 떨어져도 마음만은 늘 한국땅에 건너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머물러 있음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느낀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르며 짊어진 배낭 속에 기쁨과 슬픔을 채우고 비우는 일을 수없이 해 왔건만 지금도 반복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살아가면서 시드니의 등산로 내리막길처럼 처음엔 쉽게 생각한 삶이 올라갈 때는 힘들다는 걸 몰랐다. 오히려 한국의 산처럼 처음에 올라갈 때 힘들지만 내려갈 때는 더 쉽게 여기며 살아온 나를 발견한다. 인생에 있어서도 이제 내리막길이 아니던가. 내리막길에서는 더 가속도가 붙어 어느새 순식간에 목표지점에 간다는 걸 알고 있다. 아쉬움을 머금고 천천히 가려는 생각조차 못 한다. 오십과 육십이라는 숫자를 넘어서는 나이가 되었지만 저 고개를 넘어가는 길조차 찾지 못하며 헤매고 헤매다 여기까지 와 버렸다. 아, 이제는 나도 내려가야 된다는 걸 몰랐다. 이미 꼭지점을 찍은 지 오래다. 최고점에 서 있을 때가 언제이며 그 기분이 어땠는지 기억도 없다. 아쉽다. 그 때가 내 인생의 봄날이었을 텐데 말이다. 지금은 산허리에서 잠시 주춤할 시간이라도 있지만 두 세 발자국 내디딤과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이 산과 저 산을 잇는 터널에 들어가야 한다. 이 산에서는 얼마나 땀 흘려 잘 올라왔는지, 짊어진 가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잊지 않고 넣었는지도 확인할 때가 된 거다. 그래야 부끄럼 없이 마주한 저쪽 산 내리막 길로 건너갈 수 있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살아가는 모습이 산과 산이 가깝게 있는 모습과 같다. 어느 때부터인가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익숙해진 여기로 와야 된다는 신호이다. 멀리서 바라다보는 산속에는 숲이 우거지고 꽃이 피어 새도 울고 아름답게 보일 수만 있겠는가. 그 산에 가깝게 다가가면 새똥이 떨어져 시들은 꽃잎과 나뭇가지도 지저분하게 보일뿐이다. 사람과 사람도 너무 가까우면 새똥도 보여 냄새나고 시들은 꽃잎도 보기가 어색해진다. 내리막길에 발을 딛고 있는 이 시점에서 조심해서 내려가야 한다. 그래야 목표지점에서 땀 흘리고 걸어온 보람을 만끽하지 않겠는가. 마음껏 한 번 웃어 보이며 다음 터널로 발을 옯겨야 한다는 사실도 실감하며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그녀는 내리막길이 쉽다고 생각하고 반동을 이용하여 힘차게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말이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속도 조절을 못해 온 몸에 멍이 들도록 심하게 상처를 안고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보았다. 그녀의 마음에도 아리고 쓰라린 상처가 생겼다는 걸 말이다. 아니 벌써 내가 여기까지 와 있었나하는 눈앞의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그림자 되어 옆에 있었다. 인생의 내리막 길에서…

 

김 마리아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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