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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칼럼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 광장’

시드니 한인작가회 ‘산문 광장’

[이정금]

빨간 코트

생일에 며느리가 빨간 코트를 선물했다. 이 나이에 어울릴까? 며느리는 연세가 드실수록, 그리고 어머니 얼굴이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게 생겼으니 밝은 색을 입어야 한다며 웃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너무 가난했다. 일제강점기 시대, 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가셨다. 생사를 모르는 남편 대신 어머니는 7남매를 혼자 키우셨다. 해방 후 빈손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무엇이 억울한지 허구헌날 술로 세월을 보내며 “왜 왔는가, 왜 왔는가.” 한탄하며 세월을 보냈다.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어린 자식 끼니 걱정에 안 해본 일이 없으셨다. 어려운 중에 어려움이 또 다시 닥쳤다. 한국전쟁이었다. 온 국민이 생사에 떨며 생활고에 시달렸다. 전쟁 후 먹을 것이 귀하여 식구 많은 집은 숟가락 수 줄인다고 딸을 부잣집에 식모로 보내기도 했다. ‘너라도 배불리 먹으라’고 울며 보냈다.

 

고만고만한 애들과 젊은 아낙네가 굶는 것을 밥 먹듯이 하는 걸 딱하게 보고 옆집 할머니가 장사 해보는 걸 권했다. 무엇을 못 하겠는가, 가르쳐준 대로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많은 식구가 지탱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농사를 짓고 산에 가서 나무하기, 나물 캐기 등등 양식이 되는 것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죽으면 썩어질 육신 놀리면 무엇하냐고 어머니는 채근하셨다. 조그만 체구에 작은 소리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셨는지… 어머니를 따라 열심히 일했으나 항상 배가 고팠다. 흰 쌀 밥에 김치를 맘껏 먹는 게 소원이었다. 큰 언니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한다니까 아버지는 반대하셨다. 초등학교만 나오고 집에 있다가 시집 가서 살림 잘하는 게 잘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언니들 책을 태워버리기도 했다. 공부만 시켜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빌고 빌어 간신히 어머니 허락을 받았다. 그 덕에 우리는 줄줄이 쉽게 진학을 할 수 있었다. 큰 언니는 선생님이 되겠다고 사범학교에 진학했는데 남녀공학이었다. 무엇에나 열심인 언니는 노래, 운동 등 못 하는 게 없어 인기가 좋았었나 보다. 언니를 따라오는 남학생을 엄한 아버지가 잡아 때리고, 정신 차리라고 물까지 뒤집어 씌어 쫓아냈다. 나는 여자와 남자가 같은 자리에만 있어도 임신 되는 줄 알았고, 연애하는 것을 죄악시 했던 무모한 시절이었다.

상급학교 진학 때도 알아서 원서 쓰고 모든 걸 혼자 해결했다. 입학금 낼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책은 헌 책을 사고, 그 돈도 없어 남의 책을 빌려서 공부했다. 큰 언니 때부터 내려온 교복을 줄여 입고 입학할 때 얼마나 좋았던지. 어쩌다 새 신발을 사게 되면 얼마나 좋은지 안고 자고, 신발이 닳을까봐 웬만한 곳은 신발을 벗어 들고 다녔다. 신발이 낡고 떨어지면 실로 꿰맸다. 형제들이 모두 학생이니 등록금 낼 때가 되면 어머니의 한숨 소리는 커졌다. 등록금을 못 내 시험 때 쫒겨 오면 “에미한테 말도 못하고 내 새끼 어쩔까” 하고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우셨다. 처음에는 창피하고 슬펐으나 여러 명이 함께 쫓겨나니 나중에는 크게 슬프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실까,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꼭 성공해야지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렇게 가고 싶은 수학여행 한번 가보지 못했고, 배우고 싶은 피아노는 친구가 연습하는 옆에서 따라 배웠다. 하지만 어머니를 이해했고 꼭 성공하여 효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시절 평범한 우리 국민들의 생활상이었다. 감사한 것은, 곤궁한 중에도 남의 집에 보내지 않고 많은 자식들을 끝까지 교육시키고 사랑을 아까지 않으신 점이다. 가냘픈 어머니는 우리를 지켜주셨다. 시집가서 애들 키우고 살기 바빠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하는 내가 죄송스러워 하면 배불리 먹이지도 못하고 입히지도 못하고 그래도 이렇게 잘되었는데 무얼 바라겠냐며 오히려 쌈짓돈을 손에 쥐어 주시던 어머니. 눈물 어린 어머니의 눈이 지금도 보인다. 어머니는 어떠한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으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긍정적으로 적응하고 살 수 있게 키워주셨다. 지나고 보니 가난이 내겐 큰 고통이었으나 오히려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며느리에게서 선물 받은 빨간 코트가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그해 겨울은 매우 추웠다. 조례시간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제일 큰 학생이 앞에 서고 차례로 열을 서서 가장 키가 작은 나는 꼴찌로 맨 뒤에 섰다. 그 때는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을 관찰했다. 빙 둘러보시고 얇은 옷을 입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를 교장실로 불렀다. 교장선생님은 추위로 빨개진 내 손을 부비며, 춥겠다고 그윽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겁이 나서 떨고 있는 내게 빨간 코트를 입어보라고 내주었다. 순간 나는 막 울었다. 안 입는다고 울었다. 그 후 교장 선생님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빨간 코트는 우리 반 다른 학생이 입고 다녔다. 지금도 미국인 교장 선생님의 파란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 가냘픈 몸매, 천사와 같은 조용한 미소와 함께…. 나는 그 때 그런 고마운 마음을 왜 거절했을까? 그 당시 흔치 않은 빨간 색 옷이어서 였을까? 세월은 변해 산수를 바라보는 나이에 며느리에게서 빨간 코트를 받은 감회로 옛날을 회상해보았다.

며칠 후, 우리 작가회 모임이 있는 날에는 빨간 코트를 입고 나가련다.

 

이정금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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